추상적 근황 by deulpul

1. 수영을 배울 때 말입니다.

어릴 때 말고 다 커서 헤엄치기를 좀 본격적으로 배우려고 작정하면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우선 수영 강습부터 끊어놓고 봅니다. 어떤 사람은 스포츠 매장에 가서 보기 좋은 수영복을 고르는 게 첫째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없는 시간을 짜내느라 시간표 짜는 데 골몰합니다. 어떤 사람은 수영과 관련한 책부터 사모으기 시작합니다.

(드물게는 저걸 동시에 다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맨 마지막 형(型) 입니다. 의욕과 관심이 생기면 자료 수집부터 시작합니다. 뭔 일이든 시작하려면 우선 화끈하게 사고부터 쳐야 함을 알면서도, 천성 탓인지 마음에 비해 손발이 좀 늦습니다. 그래서, 팍팍 밀어부치는 추진력은 떨어지지만 실수는 크게 안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그 간격, 심장(欲)과 머리(考)와 손발(行)이 제각기 따로 노는 그 시차 동안은 상당히 괴롭습니다. 하긴 어떨 땐 그 괴로움도 즐거울 때도 있습니다.

아... 헤엄치기를 배우려고 하고 있는 중은 아닙니다.

2. 온라인에서 만나는 사람 관계는 좀 특이한 데가 있습니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고, 오로지 보여주는 텍스트(혹은 이미지)로만 교류가 이루어지는 게 한 원인일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누군가가 온라인 영역에서 갑자기 사라지면 아쉽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합니다. 전화로나 다른 어떤 통신 수단으로 근황을 확인할 수도 없구요.

어떨 때 보면, 오프라인에서와는 또다른 따끈따끈하고 가축적인 관계가 만들어지는 곳이 온라인인 것 같기도 하지만, 실제 삶에서 누군가와 의절하거나 혹은 세상과 절연할 때 필요한 정서적 에너지의 1%도 못되는 에너지로 손쉽게 관계가 끊어질 수 있으니, 온라인 세계의 교류란 작은 물방울 하나에 구멍이 뚫리는 습자지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3. 예전에 '삐삐'(pager) 가 원거리 통신의 주요 수단이던 시절, 부재중 음성 녹음 서비스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있는지 몰라...) 누군가에게 삐삐를 쳤는데 응답할 수 없는 상태일 때, 음성으로 녹음을 남기는 것이죠.

- 고객의 음성 사서함에 다섯 개의 메세지가 녹음되어 있습니다. -
"OO야... 너 어딨냐? 요즘 바쁘냐? 여기 다들 기다리니까 얼른 전화좀 해라, 임마... 끊을께."
"오빠... 왜 요즘 전화 안받아? 사무실에도 맨날 없다고 그러네... 보고싶으니 전화좀 해줘요."
"아빠다. 집에 좀 들어와라. 얼굴 잊겠다."
"안녕하세요? 무랑루즈카페 김마담이에요, 호호호... 외상값 좀 갚으셔야죠? 한번 오세요."
"OO냐? 또 난데, 우리 지금 딴 데로 자리 옮기거든. 어디로 가냐면 말야... (야, 어디로 갈꺼야? (와글와글) 어? 거기? 야, 거긴 물이 안좋잖아. (시끌벅적) 어? 거기?...) 야, 가만있어봐. 좀 있다가 다시 전화할께."


(제 경우를 예로 든 것이 아님.)

실화로 기억하는데, 어떤 청년이 교통사고로 숨지고 나서, 사람은 갔지만 음성 녹음 시스템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그의 쾌활한 목소리를 듣고 듣고 또 들으며 슬퍼하던 가족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홈페이지든 싸이든 블로그든 게시판이든 간에, 자신의 생각과 움직임을 생생하게 그려둔 공개 기록이 차고 넘치는 온라인 시절이란, 그 청년처럼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지기가 더욱 어렵게 된 때가 아닌가 합니다. 나와 함께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나의 '뒤에' 나의 무엇인가가 남는다는 것은, 가끔 좀 부담스럽습니다.

이 즈음에서, 양영순의 명작 <아색기가> 시리즈 중, 갑자기 저격을 당해 죽게 된 청년이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짜내 필사의 노력으로... 자기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는 음란물을 지우느라 애쓰는 장면이 불현듯 떠오릅니다... 헤헷.

4. 저는 잘 살고 있습니다. (Hikaru님, 안부 물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당장 벌여놓은 일이 한달 쯤 뒤엔 마무리될 것이므로, 그 때 다시 신나게 헛말질을 재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헛손질, 헛발질이 있는데 헛말질이 없으리란 법은 없죠.

맥주가 조금 줄고 대신 담배가 조금 늘고, 운동을 좀 건너뛰고 있으며, 혼자 지내는 시간이 좀 많아졌습니다. 가만히 앉아 바삐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담배를 피우노라면, 고독이 인간을 최후로 완성시켜 준다는, 아주 옛날에 새기고 다니던 그런 치기어린 글귀들도 가끔씩 떠오르곤 합니다.

뭐,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만, carpe diem... 이 더한층 간절한 표어가 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삶의 모토인 和而不同 과 거의 동격에 오를 지경.)

언젠가 블로그에, 바빠야 생산성이 높아진다고 큰소리 뻥뻥 쳐놨는데, 과연 그런가 다시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생산성이 높아지더라도, 개인이 관여하고 있는 전 영역에서 동시에 엄청난 생산물을 쏟아내는 형태는 아닌 것이 아닐까 하고 스스로 타협하는 중입니다.

5.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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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카스미 2005/06/08 17:33 # 답글

    잘 계시다니 다행이네요. 한동안 근황이 궁금했습니다.
    역시 이쪽은 취미생활이니까요. 쓰고 싶을때 쓰는 게 제일 좋겠지요..
    아쉽게도 온라인상에서의 관계가 좀 가벼운 느낌이 들긴 합니다.
    덧. 가축적인 관계…라니. 좌절입니다; orz
  • yaalll 2005/06/08 19:34 # 답글

    화이부동....덕분에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건강하시길
  • Hikaru 2005/06/08 19:48 # 답글

    저도 잘 지내고 있어요.
    블로그는 어떤 매체보다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이 마치 가까운 이웃처럼 느껴져요.
    지금 고민하는 것에 대해 좋은 답을 얻길 바래요. 들풀님도, 저도요.^^
  • 로젠탈 2005/06/08 19:54 # 답글

    저도 링크시켜놓고 들풀님의 글을 즐기는 독자예요. 잡담 하나하나도 뭔가 내재된 포스가 느껴져서 참 마음에 드는 글을 쓰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잘 지내신다니 괜히 기분이 좋네요.^^
  • happyalo 2005/06/08 23:05 # 답글

    이야, 오랜만에 근황 포스팅을 해주시니 좋습니다.
    말씀대로 온라인의 세계가 묘해서... 오고갈 때는 오프의 어떤 관계보다도 좋은 거 같다가도 문 닫으면 막막하게 탁 끊기더라구요.
    건강하세요~ (참고로 저도 수영 하려면 자료 수집부터 합니다. 문제야, 문제... ^^)
  • 여행자 2005/06/09 20:48 # 답글

    여기도 방을 만들었다. 좀더 숨어서 살고 싶어서. 점점 숨고 싶고, 한적한 곳으로 들어가고 싶네.
  • issuelit 2005/06/14 00:07 # 삭제 답글

    눈팅만 하는 한 고등학생입니다~_~/

    공부중에 산뜻한 기분이되는 포스팅이었던 곳이 조용해서

    걱정했었습니다.

    근황 포스팅 최고! 수영..수능끝나면 해볼까요..
  • 지아쿨 2005/07/01 21:15 # 답글

    핑계 같지만 제가 한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이글루질을 못했습니다. 간만에 들풀님 얼음집에 놀러왔는데 바쁘신가 보네요. 그래도 잘 살고 계신 듯해서 좋습니다. 바쁜 일 마무리 잘 지으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뵐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참! 전 수영을 배울 때 드물게 모든 것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형입니다. 한번 맘먹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맘만 먹으면 일사천리형이거든요.^^;;
  • 2005/08/07 13:35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05/08/21 09:49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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