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방황(?)하던 시절, 나의 하루 생활비는 2천원이었다. 머리가 크고 공부까지 다 마쳤으니 집에 손을 벌리지는 않기로 작정한 터라 씀씀이를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하긴 아침에 안국동 쪽의 한 시립 도서관에 동전 하나를 주고 들어가면 그 뒤로 별로 돈 쓸 일도 없었다.
그러나 주머니가 가벼워서 아쉬운 점이 아주 없진 않았는데, 그건 해가 기울 무렵 친한 친구와 종묘 돌담길을 어슬렁어슬렁 걸어 대학로로 나왔을 때다. 마침 그 때는 시간으로서나 머리의 혼곤함으로서나 목이 마르기 딱 좋은 즈음이었던 것이다.
친구와 내가 원남동 네거리에 서서 주머니를 탈탈 털면, 나중에 집에 갈 차비를 빼고 딱 소주 한 병과 새우깡 한 봉지를 살 돈이 나왔다. 저녁을 먹든 안먹든 거의 언제나 그랬다 (매일 마셨다는 것은 아니다. 나도 사람이다). 단골이 되다시피 한 구멍가게의 쥔장은 작은 비닐잔 두 개를 항상 덤으로 주었다.
그렇게 친구와 동숭동 어느 그늘에 정좌하여 천천히 먹는 소주는, 그 맛이 처량하다거나 우울하진 않고, 오히려 달고 기쁘고 감사스러웠다. 수십분 걸어오는 동안에 이미 한참을 떠들었으면서도, 비닐 소줏잔을 앞에 놓고서야 이제 비로소 제대로 이야기 한판 하자는 심사가 드는 것도 언제나 똑같았다.
소주 한 병이면 둘이서 각자 넉 잔이나 받을까말까다. 병이 비어갈 무렵이면 좀 아쉬운 생각이 안나는 것은 아니었다. 간혹, 며칠 전 찾은 시계를 다시 단골 술집으로 보내야 할까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오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나무 그늘 아래에서 오가는 사람을 관찰하며 세상 잡사를 논하는 이 간단한 술자리는 대체로 그것만으로도 적당한 호사였다.
그런데, 우리의 이 동숭동 호사를 더욱 호사스럽게하는 불청객이 한 명 있었으니,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대학로의 천사였다. 우리보다 조금 연상으로 보였던 그는 거의 매번 우리 술자리에 등장했다. 실은 등장했다기보다, 어느 순간엔가 홀연히 다가와 언제나 딱 한마디만을 던졌다.
"저...... 술 함께 마실 수 없을까요?"
아, 이 얼마나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일듯한 말인가. 아는 사람은 안다. 저 한 문장 속에 얼마나 많은 내러티브가 담겨 있는지.
그는 젊고 건강했으며, 풍기는 이미지로 봐서는 단순한 천사가 아니라, 동숭동에 산재한 어느 극단의 배우 지망생쯤으로 보였다. 무엇이었든간에 그도 우리처럼 소주와 사람과 이야기에 목이 마른 것은 틀림없었다.
어쨌든, 우리의 대답도 대개 한 가지였는데,
"죄송합니다."
이것이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가.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자리를 뜬다. 그러나 우리를 만나면 언제든지 똑같은 말을 들고 또 찾아온다. 그를 이 술자리에 참석시킨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물론 한정된 알콜 자원이 그 이유였다. 그의 등장으로 인해, 그 간소하고 소박한 소주 한 병짜리 술자리는 갑자기 주지육림의 만찬장으로 격상되곤 했다. 어쨌거나 이렇게 간소한 술자리조차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소주값 인상을 둘러싼 논란을 보다보니 옛날 생각이 난다. 소주값은 세금을 올리려는 목적 때문에 인상될 지경이라고 한다. 세수(稅收)를 위해서든 건강을 위해서든, 또 무슨무슨 명분을 갖다 붙이더라도, 좀 빠져나갈 구멍은 남겨놓고 몰아쳤으면 한다. 당시의 소주값, 담뱃값이 지금처럼 비싸거나 비싸질 지경이었다면 나와 친구의 대학로 호사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 자리에서 그와 나눈 하늘의 별과 같은 이야기들도 모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머니가 가벼워서 아쉬운 점이 아주 없진 않았는데, 그건 해가 기울 무렵 친한 친구와 종묘 돌담길을 어슬렁어슬렁 걸어 대학로로 나왔을 때다. 마침 그 때는 시간으로서나 머리의 혼곤함으로서나 목이 마르기 딱 좋은 즈음이었던 것이다.
친구와 내가 원남동 네거리에 서서 주머니를 탈탈 털면, 나중에 집에 갈 차비를 빼고 딱 소주 한 병과 새우깡 한 봉지를 살 돈이 나왔다. 저녁을 먹든 안먹든 거의 언제나 그랬다 (매일 마셨다는 것은 아니다. 나도 사람이다). 단골이 되다시피 한 구멍가게의 쥔장은 작은 비닐잔 두 개를 항상 덤으로 주었다.
그렇게 친구와 동숭동 어느 그늘에 정좌하여 천천히 먹는 소주는, 그 맛이 처량하다거나 우울하진 않고, 오히려 달고 기쁘고 감사스러웠다. 수십분 걸어오는 동안에 이미 한참을 떠들었으면서도, 비닐 소줏잔을 앞에 놓고서야 이제 비로소 제대로 이야기 한판 하자는 심사가 드는 것도 언제나 똑같았다.
소주 한 병이면 둘이서 각자 넉 잔이나 받을까말까다. 병이 비어갈 무렵이면 좀 아쉬운 생각이 안나는 것은 아니었다. 간혹, 며칠 전 찾은 시계를 다시 단골 술집으로 보내야 할까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오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나무 그늘 아래에서 오가는 사람을 관찰하며 세상 잡사를 논하는 이 간단한 술자리는 대체로 그것만으로도 적당한 호사였다.
그런데, 우리의 이 동숭동 호사를 더욱 호사스럽게하는 불청객이 한 명 있었으니,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대학로의 천사였다. 우리보다 조금 연상으로 보였던 그는 거의 매번 우리 술자리에 등장했다. 실은 등장했다기보다, 어느 순간엔가 홀연히 다가와 언제나 딱 한마디만을 던졌다.
"저...... 술 함께 마실 수 없을까요?"
아, 이 얼마나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일듯한 말인가. 아는 사람은 안다. 저 한 문장 속에 얼마나 많은 내러티브가 담겨 있는지.
그는 젊고 건강했으며, 풍기는 이미지로 봐서는 단순한 천사가 아니라, 동숭동에 산재한 어느 극단의 배우 지망생쯤으로 보였다. 무엇이었든간에 그도 우리처럼 소주와 사람과 이야기에 목이 마른 것은 틀림없었다.
어쨌든, 우리의 대답도 대개 한 가지였는데,
"죄송합니다."
이것이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가.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자리를 뜬다. 그러나 우리를 만나면 언제든지 똑같은 말을 들고 또 찾아온다. 그를 이 술자리에 참석시킨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물론 한정된 알콜 자원이 그 이유였다. 그의 등장으로 인해, 그 간소하고 소박한 소주 한 병짜리 술자리는 갑자기 주지육림의 만찬장으로 격상되곤 했다. 어쨌거나 이렇게 간소한 술자리조차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소주값 인상을 둘러싼 논란을 보다보니 옛날 생각이 난다. 소주값은 세금을 올리려는 목적 때문에 인상될 지경이라고 한다. 세수(稅收)를 위해서든 건강을 위해서든, 또 무슨무슨 명분을 갖다 붙이더라도, 좀 빠져나갈 구멍은 남겨놓고 몰아쳤으면 한다. 당시의 소주값, 담뱃값이 지금처럼 비싸거나 비싸질 지경이었다면 나와 친구의 대학로 호사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 자리에서 그와 나눈 하늘의 별과 같은 이야기들도 모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덧글
지아쿨 2005/10/15 10:58 # 답글
안국동, 종묘 돌담길, 원남동, 대학로, 그리고 소주 한 병과 새우깡 한 봉지...절로 아련한 그리움이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단어들입니다.
Hikaru 2005/10/15 23:49 # 답글
왠지 그런 추억거리가 있다는게 부러운데요?저도 어린만큼 그런 추억 만들 기회가 오겠죠? 헤헤;;
happyalo 2005/10/20 22:44 # 답글
추억은 언제나 달콤하네요. ^^비단풀 2005/10/22 23:29 # 답글
대학로 천사의 '내러티브'를 감지하시고서도 번번이 "죄송합니다" 한 좌판의 두 분의 내러티브를 읽게 되는 건가요. 비닐 잔에 아껴 마시던 소주 한 병처럼 아련한 글입니다.카스테라 2005/10/24 16:03 # 답글
이오공감에서 왔는데, 그 글보다는 이 글이 더 맘에 드네요- :)잘 읽고 갑니다. 종종 놀러올께요-
deulpul 2005/10/27 05:46 # 답글
지아쿨: 그 쪽을 좀 아셔요? 제겐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거든요. 아, 새우깡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Hikaru: (어리긴 뭐가 어리다구욧! Hikaru 님이 어리면 저는 청소년) 옛날 국어책에서였나요, 가난한 날의 행복. 신혼부부가 쌀이 떨어져 밥 대신 고구마를 먹으며, 나중에 이런 추억도 없으면 어쩌냐 해쌓던 게 기억나네요. 이상하게 지난 날 기억은, 좀 궁상맞은 것들이 생각도 훨씬 많이 나고 '그 때가 좋았지' 이렇게 느껴진단 말여요. 그래도, 추억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그럴 필요는 없겠죠? 하루하루 보람차고 신나게 사셔도 나중에 보면 좋은 추억이 되어 있을 겁니다.
happyalo: 네, 달콤하기고 하고, 새우깡 맛처럼 고소하기도 하고, 소주 맛처럼 씁쓸하기도 하네요... 다행스러운 것은 '도라지 위스키' 맛까지는 아직 안난다는 것.
비단풀: 아이구, 비단풀님처럼 이야기를 감칠맛있게 풀어내는 힘이 있었더라면 한결 그럴듯한 이야기 한 토막이 되었을텐데요. 항상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카스테라: 헙... 공감 글이 마음에 안드신다니... 밉습니닷!!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