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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한 송이를 들고 지그시 미소지으며 커뮤니케이션하는 심심상인을 빼면, 도로 표지판은 의사소통을 위한 메세지 중에서는 가장 압축된 종류일 것 같다. 표지판은 그 특성상 분량은 최소로 줄이고 표현은 최대한 명료해야 한다. 특히 차량이 빠르게 달리는 도로에서는 더욱 그렇다. 일 초에 수십 미터를 이동하는 사람의 눈에 띄어야 하니, 도로 변, 머리 위, 길 바닥까지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공간을 활용하여 자신을 드러내려 안간힘을 쓰는 모양이 된다. 그 소리 없는 아우성은 유치환의 깃발 만큼이나 눈물겨워 보이기까지 한다.
최소로 압축한 내용을 최대한 명료하게 표현해서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표지판의 메세지는 마치 뉴스 기사의 제목과 같다. 내용을 잘 담고 있으면서도 독자(운전자)의 눈을 확 끌어당겨야 하고, 제한된 글자 수 안에서 표현해야 하면서도 뜻이 잘 통해야 한다. 어렵다. 내용 자체가 간명하다면 그나마 수월하겠지만, 도로 표지판으로 전달해야 할 내용이 어쩔 수 없이 길어질 때는 어떻게 할까. 내가 본 도로 표지판 중에 가장 길었던 것은 양양에서 한계령으로 오르는 국도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경고 표지판이다. 바다 냄새를 거의 벗어나 백두대간 고개가 시작될 즈음에 서 있던 이 표지판들은 놀랍게도 장문의 글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이 블로그 사이즈를 기준으로 적어도 두 줄은 될 내용을 표지판으로 집어넣었는데, 한 번엔 안보일 테니 어쩔 수 없이... 쪼갰다. 그리하여, 마치 연속 드라마처럼, 한 문장을 표지판 대여섯개에 나뉘어 차례로 등장시켰다. 예컨대, 1번 표지판: "이 44번 국도는 경사가 심하고" (10초쯤 뒤) 2번 표지판: "급커브 구간으로" (10초쯤 뒤) 3번 표지판: "사고가 많이 나는 곳이니" (10초쯤 뒤) 4번 표지판: "속도를 줄여서 안전운행 하시고" ... 하는 식이다. 그래도 글자가 많아서, 각 표지판 하나하나도 꽤 크기가 컸던 것 같다. 엽기적이긴 하되, 그냥 "사고 다발 지역"이라고 위압적으로 쓸 수도 있는 것을 저렇게 주절이주절이 표지판까지 시리즈화하면서 늘어놓은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놀랍도록 기특해 보였다. 도로 표지판은 운전이라는 행위에 끊임없이 개입해서 영향을 미쳐야 하는 메세지다.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조건 때문에, 그 메세지의 소통 방식은 대단히 위압적이다. 뭐, 법의 구조 안에서 소통되는 메세지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해할 만도 하다. 미국도 마찬가지인데, 간명하게 압축하다보니 표현이 딱딱해진다.
그런데, 이렇게 단정적이고 위압적인 형태가 표지판의 일반 표현 형식이지만, 좀 망설이고 고뇌하는 표지판도 있다. 예컨대, "BRIDGE MAY BE ICY"가 그렇다. 겨울에 다리 위 도로는 습기 때문에 다른 도로보다 미끄러울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게 아니니 "BRIDGE IS ICY"라고 할 수도 없다. may be... 가 최선이라면 최선이다. 미국 도로에서 물음표가 붙은 표지판을 딱 한 번 본 적 있다. 산을 타는 고속도로에서 길다란 터널을 빠져나왔는데, "LIGHT ON?"이라고 한다. 터널 들어가기 전에 "REMOVE SUNGLASS" 하고 "TURN ON LIGHT" 해놨으니, 나오면서 전조등 끄라는 이야기다. 딱딱하게 "불 꺼!" 하지 않고 "켜 있니?" 하는 게, 한계령 진입로의 연속극 표지판처럼 말랑말랑하게 느껴져서 볼 때마다 기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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