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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저녀 단상 3 : 루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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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기본적으로 제로-섬(zero-sum) 원칙 위에서 굴러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윈-윈(win-win) 상황이 아주 없지는 않더라도 생각만큼 자주 벌어지지는 않는다고 믿는 편이다. 그런 순진한 기대를 가지기에는, 야박한 경제 논리가 지배하는 이 세상이 그리 만만치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관련자 모두가 혜택을 보는 윈-윈, 윈-윈-윈, 윈-윈-윈-윈 게임이라고 착각하게 하는 상황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1년 전쯤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팻 틸만(Pat Tillman)이라는 미국 젊은이가 있었다. 잘 나가는 프로 미식축구 선수로, 9/11 이후 군대에 자원 입대하여 아프가니스탄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그는 미국인의 영웅이었다. 미식축구 선수로도 그렇고 테러 세력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해 자원 입대하여 더욱 그렇게 됐으며, 적과 교전중 사망하였으므로 더더욱 그렇게 됐다. 다시 쓰기가 귀찮아서, 전에 쓴 걸 그대로 인용하면, 틸만이 적과 교전하다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 여론은 또 한번 들끓었다. 많은 언론들은 틸만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라는 최고의 칭송을 그의 죽음에 헌사했다. 모든 특혜를 떨쳐버리고 전쟁에 자원하여 나가 적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틸만은 국가를 위한 영웅적 희생의 상징으로 각인됐다. 그의 사망을 전하는 기사들은 '용기, 용맹, 영웅, 위대한 소명, 애국적 가치, 희생' 같은 말들로 가득 찼다. 틸만의 장례식은 2004년 5월3일 고향인 캘리포니아의 산호세에서 웅장하게 거행됐다. 장례식 장면은 전국에 생중계됐다. 사망한 틸만에게는 은성무공훈장과 퍼플 하트가 수여되고 계급 특진까지 주어졌다. 고 한다. 그런데 얼마 뒤, 틸만은 적과 영웅적으로 싸우다 죽은 게 아니라, 바위 뒤에 움츠리고 있다가 뒤쪽에서 날아온 아군의 총알에 절명한 것으로 밝혀졌다. 일선 지휘관들은 사건 직후 바로 사실을 파악했으나, 이를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고, 그 결과 틸만은 영웅으로 살다 영웅으로 죽게 되었다. 사실이 어쨌든, 틸만이 테러리스트와 영웅적으로 싸우다 죽은 것으로 사건이 매듭지어졌다고 해보자. 손해보는 사람 아무도 없다. 틸만은 비록 죽었으나 미국인의 영웅이 되었다. 틸만의 가족은 미국인으로부터 칭송받는 명예로운 가정이 되었다. 미군 당국은 이왕 벌어진 한 유명인 출신 병사의 죽음을 미국 군대에 대한 자부심을 높이는 데 한껏 활용할 수 있다. 미국 정부 처지에서 보면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미국인의 관심을 높이고 애국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아무도 손해보는 사람은 없고 오로지 승자만 존재한다. 윈-윈-윈-윈 게임이 아닐 수 없다. 그런가? 표면적으로 보기엔 아무도 손해보는 사람이 없지만, 이러한 게임에도 피해자는 존재한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걸고 지켜온 '진실'이 그 첫 번째 피해자요, 거짓을 진실로 믿고 속아줄 수많은 사람이 그 두 번째 피해자다. 피해와 희생은 추상적인 것이어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 개인이나 가족의 명예, 훈장 몇 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것이다. 제시카 린치(Jessica Lynch) 일병도 비슷한 경우다. 2003년, 이라크에 투입되어 이동하다 이라크군의 공격을 받고 포로가 되었다가 미국 특수부대의 용감한 작전으로 구출된 그 린치 일병이다. 미군 당국 발표에 따르면, 린치 일병은 이라크군의 공격을 받고 동료 병사들이 모두 사망한 가운데 홀로 처절히 응사하다가 포로가 됐다. 이라크 진영에 끌려간 린치 일병은 모진 고문을 받고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영구히 MIA(작전중 실종) 신세가 될 뻔했다. 그러나 미군 특수부대의 용감한 구출 작전 끝에 무사히 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영웅이 탄생한 것이다. 린치 일병에게 퍼플 하트 훈장이 수여된 것은 정해진 절차. 그러나 뒤이어 밝혀진 진실은 미군 당국의 발표와 달랐다. 처음에 린치는 이라크에 잡혀있는 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대신, BBC를 비롯한 언론의 추적 끝에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이라크군의 고문은커녕, 린치는 이라크 병원에서 잘 보살핌을 받았으며, 이라크 당국이 린치를 치료한 뒤 돌려보내려 했으나 미군이 거절했다는 것도 밝혀졌다. 병원 관계자가 린치를 앰뷸런스에 싣고 미군 진영으로 갔으나 미군의 총격을 받고 되돌아온 사실도 폭로되었다. 용감한 특수 부대가 시도한 '린치 일병 구하기' 작전은 기실 이라크군의 저항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병원에서 연출되었다. 이를 위해 미군은 카메라까지 들고 들어갔으며, 린치를 들것에 올린 뒤 준비해간 성조기로 감싸는 것도 잊지 않았다. 훈장이며 뭐며 받을 거 다 받고 나서 나중에 '기억이 돌아온' 린치는 자신이 이라크군과 교전하다 잡힌 게 아니며, 총 한 방 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이라크 병원에서 자신을 잘 돌보아 주었으며, 어느 간호사는 밤마다 자신에게 자장가까지 불러줬다고 했다. 결국 그는 미군이 왜 카메라까지 들고 들어와 난리치며, 잘 보호받고 있는 자신을 '구출'했는지 의문이며, 아무래도 자기가 미군 당국에 이용당한 것 같다고 고백했다. 그의 진술을 토대로 하여 나온 책 <저도 군인이에요>(I Am a Soldier, Too: The Jessica Lynch Story)는 지금 아마존닷컴에서 단돈 1센트(10원)에 팔리고 있다. 그냥 미군 발표대로 린치가 그렇게 잡혀서 그렇게 고문당하다 그렇게 극적으로 구출된 것으로 이야기가 매듭지어졌다고 해보자. 손해보는 사람 아무도 없다. 린치는 그대로 영웅이 되었을 것이며, 그의 가족과 웨스트버지니아의 동네 사람들은 한껏 자부심을 가졌을 것이다. 이라크가 자발적으로 돌려준다는 것을 거부하고, 이틀 뒤 총 대신 카메라를 들고 쳐들어간 미군 특수부대는 영웅적 포로 구출 작전으로 명성을 높였을 것이다. 미군 당국과 미국 정부가 얻는 이득은 틸만의 경우와 비슷하다. 그러나, 아무런 피해자가 없고 모두가 승자인 것처럼 보이는 이 경우 역시, 최대 희생자는 '진실'과, 거짓을 진실로 믿게 될 수많은 사람들이다. 이 피해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이런 사건은 절대 윈-윈... 상황이 될 수 없다. 의도된 대로 사건이 결말날 경우, 이같은 사이비 윈-윈은 앞으로 계속 반복될 것이며, 결국 모두가 지는 루즈-루즈(lose-lose) 상황으로 진화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승자인 것처럼 보이거나 그렇게 포장하고 싶어하는 측이 존재할 때, 우리는 눈을 똑바로 뜨고 귀를 열어야 한다. "좋은 게 좋은 거야"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눈을 닫아서는 안된다. 그들이, 모두가 이기는 상황이라고 주장하며 그냥 덮고 넘어가려 할 때, 누군가가 호각을 불어 주어야 한다. 개인의 희생을 각오하고 모두의 손해를 막는 이들이야말로 유사 이래 진행되어온 거짓과 진실의 대전쟁에서 별처럼 빛나는 진정한 영웅들이다. 내가 왜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나? 아시는 분들은 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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