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포인트의 촘스키 by deulpul

베이직으로 연결되어 있는 텔레비전 케이블 채널을 이리저리 넘기는데, 갑자기 노암 촘스키(Noam Chomsky) 얼굴이 등장했다. 주로 미국 국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회의와 청문회를 중계하는 채널 C-SPAN2의 주말판격인 BookTV에서다. 강단에 서서 열심히 말씀하시는 것이, 어디에서 또 초청 강연을 하는구나 하고 예사롭게 생각했는데, 밑에 나온 자막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Prof. Noam Chomsky
The U.S. Military Academy at West Point


그러니까, 미국의 군사 정책을 포함한 대외 정책을 누구보다 강력하게 비판하는 학자 촘스키가 미국 육군사관학교에서 생도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웨스트포인트의 촘스키? 이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조합은 어떻게 된 일인지, 방송을 지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장래의 군사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어서인지, 촘스키는 전쟁의 이모저모를 분석하는 데 시간 대부분을 할애했다. 예컨대, 이른바 '정당한 전쟁 이론'(just war theory)을 비판하면서, 일부 학자가 아무런 근거 없이 스스로 정당하다고 믿고 싶어하는 전쟁에 '정당한 전쟁'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라크 전쟁에 대한 비판도 빼놓지 않았다. 촘스키는 미국 정부가 이 전쟁을 (테러에 대비한) 예방 전쟁(preventative war)이라고 부르고 싶어하지만, 그게 말이 되려면 다른 나라도 이같은 성격의 전쟁을 수행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미국의 정치군사적 도발을 두려워하는 이란도 예방 전쟁을 일으킬 정당한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곧 이라크로 파견될지도 모를 생도들 앞에서, 미국의 이라크전은 세계 거의 모든 사람이 반대하는 침략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나중에 나온 기사에 따르면, 지난 4월20일에 있었던 촘스키의 웨스트포인트 강연 자리에 참석했던 사관생도들은 그의 견해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재미있게 경청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 생도는 촘스키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가 매우 높은 학식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고 평했다고 한다. 생도들은 이 '금세기 최고의 인텔렉추얼'1에게 뜨거운 박수로 응답했다. 강연 끝무렵에, 2008년 졸업반, 그러니까 04학번 생도들은 촘스키에게 사관학교 캠퍼스 정경을 담은 액자를 선물했다.

촘스키는 미국 국방부를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가증스런(hideous) 집단이라고 비난한 적이 있다. 웨스트포인트는 이 가증스런 집단을 재생산하는 모태와 같은 곳이다. 자신들의 지휘부인 펜타곤을 강력히 비판하는 인사를 모태에 직접 초청해 강연을 듣는 배짱이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일각에서는, 미군 상층부가 지지부진하게 밀고 나가고 있는 이라크전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일선 지휘부에 암묵적으로 퍼져 있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는 평도 내놓는다.

촘스키는 우익 꼴통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에스코트를 거부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촘스키의 역할과 비중, 그의 활동 범위를 고려해보면 그는 언제나 일정한 위험을 안고 생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날 웨스트포인트는 촘스키가 경험한 가장 안전한 강연 자리이기도 했을 것이다. 웨스트포인트의 생도들은 촘스키에 대해 어떠한 반대 시위도 벌이지 않았고 강연 도중 휘파람을 부는 것 같은 경솔한 짓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강연 자리에 참석한 생도들이 촘스키에게 보인 것은 깍듯한 존경이었다.

촘스키가 웨스트포인트 강단에 선 것은 미국 육사가 진행하는 초청 강연 시리즈의 강사 중 하나로 그가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과정을 통해 그가 강연자로 뽑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보도에 따르면 사관학교의 지휘관 중 하나인 케이시 네프 중령 역시 생도들과 함께 촘스키의 강연을 즐겁게 보았다고 한다. 그는 말하기를,

"촘스키 교수가 웨스트포인트에 초청된 것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주장을 들어보고 논쟁을 촉발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촘스키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말할 권리를 지키는 것은 우리가 여기에서 수행하고 있는 일들 중 하나입니다."

강정구 교수가 태릉의 육군사관학교에서 강연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까. 하다못해 지피지기해 백전백승할 목적으로라도 말이다. '반정부 학자'를 사관생도 앞에 세우면서, 그가 자기 생각을 말할 권리를 지키는 것이 바로 군인의 역할이라고 주장하는 군인다운 군인들이 부럽기도 하고, 이런 게 이넘들의 힘의 원천 중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게 하는 장면이었다.




1. 영국의 <가디언>은 촘스키가 마르크스, 세익스피어, 성서와 함께, 인문학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10가지 소스 중 하나이자, 그 중 생존해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역시 영국에서 발행되는 정치 문화 월간지 <프로스펙트 매거진>의 2005년 10월 조사에서 촘스키는 이 세상에서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지식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2. 예전에 쓴 <더 프로그레시브>의 '노암 촘스키와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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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ermit의 생각 2008/08/01 12:48 #

    노암 춈스키 교수를 사관학교에 초청하여 미국의 군사정책 비판을 주제로 강연토록 한 웨스트포인트 교장도 빨갱이군요(어라?)... more

덧글

  • 스트롱베리 2006/06/03 11:36 # 답글

    본문의 의미에는 별 영향이 없겠습니다만..^^ "preventative war"는 예방 전쟁이라고 번역되는 것이 어떨까요?(직역입니다만) 예전에 북핵 문제가 심각했을 때에도 사태가 악화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북폭을 하니 마니 하는 얘기가 있었을때에도 이 단어가 나왔던 거 같습니다. "방어적 전쟁"이라고 하면, 왠지 미국이 수세에 몰린듯한 뉘앙스가 풍기기도 하구요.
  • deulpul 2006/06/03 11:40 # 답글

    네~ 고쳤습니다. 감사드려요-.
  • 아크 2006/06/03 12:27 # 답글

    우와.. 정말 대단히 부러운 이성의 여유군요

    견해의 옳고 그름은 제쳐 두고, 과연 선진국이라는 느낌입니다.
  • 메르키제데크 2006/06/03 12:37 # 답글

    한국에서는 아주 힘든일이겠지요. 교수하나를 두고 상공회의소 장이 취업을 시키네 마네 하고 떠드는 사회니까요.
  • 덧말제이 2006/06/03 13:44 # 답글

    밉다가도 이런 거 보면 이 나라가 대단하다 싶어요.

    그리고... 울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기 어려운 것은 그만큼 자신이 없어서겠지요. 맞든 틀리든 자신이 있어야 반대 주장도 해봐라 하고 멍석 깔 수 있는 거 아닐까요?
  • 붕어가시 2006/06/03 15:31 # 답글

    언어를 공부할때 촘스키에 빠져 살았고, 경영학을 공부할때도 그들 피해갈 수 없었으며, 일상사에 매몰되어있는 오늘도 그의 이름을 보다니 참 질기시군요, 노암 촘스키 선생님.
  • deulpul 2006/06/03 19:58 # 답글

    아크: 이성의 여유라는 말이 딱인 것 같습니다.

    메르키제데크: 그렇겠죠? 올인하는 사회의 특징이겠습니다.

    덧말제이: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타인을 용납하지 못하는 협량의 뒷면에는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불안이 자리하는 모양이어요.

    붕어가시: 큰 나무 밑에는 너른 그늘이 드리우게 마련이죠. 촘스키의 힘은 평생을 '질기게' 일관성을 갖고 이론과 실천을 동시에 행하며 살아온 큰 나무 같은 삶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그늘 한 자락에 깃들어 살며 그저 비아냥거리는 법부터 배워가는 묘목들의 삶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고 생각합니다.
  • alster 2006/06/04 02:12 # 답글

    Just war는 우리말로 정당한 전쟁론, 즉 정전론(正戰論)이라 일컫는 것이 통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
  • deulpul 2006/06/04 02:24 # 답글

    네~ 고쳤습니다.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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