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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몇 주 동안 집을 비웠을 때다. 돌아와 보니, 떠날 때 미리 손써 두지 않은 탓에 골치아픈 일이 두어 가지 생겼다. 그 중 하나는 크레딧 카드 결제 시한이 넘어, 이자에 연체료(late fee)까지 붙은 것이었다. 금융상의 이유로 이자가 발생한 것이야 그렇다치고, 딱 한 번 피치못할 사정으로 시한을 넘겼다고 연체료를 55달러나 부과한 것은 좀 너무하다.
전화를 하긴 해야 했는데, 이런 전화는 상당한 짜증을 동반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 우선 "뭐 하려면 1번, 뭐 하려면 2번, 뭐 하려면 3번을 누르세요"가 끝임없이 반복되는 자동 녹음 응답에 시달려야 한다. 상담원과 직접 통화하기 위해 필요한 옵션은 언제나 거의 맨 마지막 단계의 맨 뒤에 있다. 겨우 이걸 찾아서 버튼을 누르면 "응답할 수 있는 상담원과 연결될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를 무한정 들어야 한다. 도대체 이런 음악을 누가 듣나 싶은 배경 음악도 나온다. 시간이 흐르면서 짜증치는 붉은 색 레벨 쪽으로 상승하고, 동시에 오른팔의 저림치도 상승한다. 주기도문과 반야심경을 번갈아 외우며 이런 과정을 잘 참고 넘긴 끝에, 가까스로 고객 상담원과 연결되었다. 그런데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참 알아듣기 어렵다. 소리가 작아서 그런 게 아니라, 뭔 말인지 알기 어려운 낯선 영어다. 뭐 그 분도 내 말을 들으며 같은 생각을 했을 테니,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곤란한 상황이 벌어졌다. 내 전화는 인도로 갔던 것이다. 한국 사람이 영어라고 말할 때, 그것은 흔히 미국식 영어를 의미한다. 교양 있는 미국넘들이 쓰는 현대 미국말이 우리가 배우는 영어의 주류고, 그걸 업계 표준으로 생각한다 ('교양 있는 미국인'은 oxymoron). 그런 점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사실은 영어가 아니라 미어(美語)다. 실제로 영어를 쓰는 나라는 미국 말고도 많지만, 이런 나라 네이티브가 한국 가서 미국인 영어 강사처럼 왕대접 받고 살기는 쉽지 않다. 한국에서는 이들이 완전 변방 깡촌의 교양 없는 하빠리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녹색평론> 1999년 11-12월호에 실린 더글러스 러미스(Douglas Lummis)의 "영어회화의 이데올로기"에 잘 언급되어 있다. (혼자서 고군분투하며 녹색평론을 만들고 있는 김종철 교수는 아예 러미스의 글을 여럿 모아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를 펴냈는데, 위의 글은 여기에도 실려 있다.) 어쨌든 나 역시 그런 교육을 받은 탓에, 전화 속에서 메아리쳐 오는 인도식 영어를 알아 듣기가 쉽지 않았다. 어떤 분들은 인도 영어가 더 알아 듣기 쉽다고 하는데, 이런 분들은 그동안 받은 영어 교육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 (믿으시면 골룸). 게다가 내가 해야 할 말은 (내 딴엔) 무리하게 물린 카드 이자나 연체료를 깎자는 것이 아닌가. 겨우 언어 장벽을 넘어서 손에 손잡고 본론을 꺼내자마자 No! 가 날아온다. 에이, 그래도 친구 좋은게 뭔가~ 하는데 계속 No! 만 반복하신다. 자꾸 사정을 설명하며 빡빡하게 굴지 마셩~ 했더니, 저도 지쳤는지, 자기 수퍼바이저한테 물어보고 올테니 좀 기다리란다. 수퍼바이저가 같은 인도인인지 미국에서 파견된 본사 직원인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이 수퍼맨바이저에게 물어보고 온 상담원은 선심 쓰듯, 연체료를 면해주겠다고 한다. 아웃소싱이 낳은 콜 센터 특수 미국인들이 물건을 사고 서비스를 받다가 문의 사항이나 불만이 있어서 회사로 전화를 걸면, 그 전화가 인도로 가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회사들이 고객 상담 부서(call center)를 인도에 아웃소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벌써 몇 년 전부터 미국 기업계에 추세가 되어온 일인데, 그러다 보니 오른쪽 The Simpsons의 한 장면처럼 대중 문화에까지 단골로 등장하는 이슈가 됐다. 이 장면은 인도 아웃소싱 부서의 현지 매니저로 파견된 호머 앞에서 인도인 직원이 미국에서 걸려온 고객 전화를 날렵하게 받는 모습이다. 미국 기업이 동쪽으로 간 까닭은? 물론 값싸고 수준 높으면서 영어까지 되는(skilled, low-cost, English-speaking) 노동력 때문이다. 인도 최고 학부를 나온 젊은이도 미국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직원 임금의 3분의 1만 주면 얼마든지 고용할 수 있다. 젊고 명민하면서도 값싼 젊은이들이 차고 넘치는 인도로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인도로의 아웃소싱을 컨설팅하는 한 회사의 평가에 따르면, 어떤 기업이 직원 1천명인 부서를 인도로 아웃소싱하면 연 1천800만 달러를 절약할 수 있다고 한다. 현재 외국 회사의 아웃소싱 관련 직종에서 일하는 전체 인도인은 125만 명. 이들이 벌어들이는 수입은 234억 달러로, 인도 국내총생산(GDP)의 5%에 이른다. 미국 회사의 인도 현지 고객 상담 부서와 관련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인도인은 40만 명에 이르며, 이 숫자는 2008년에 100만 이상으로 늘어날 전망이라고 한다. 이들이 인도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마치 중동 건축 특수가 경제 활황을 부채질하던 70~80년대 한국과 비슷한 모습이다. 인도에서 미국 회사의 고객 상담원으로 일하는 젊은이들은 인도 사회에서 이미 독특한 하위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낮밤을 바꿔 살아야 한다. 미국인의 시간에 맞춰 생활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일을 하는 젊은이들과는 어울릴 기회가 없다. 우정이든 연애든 자체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이들은 또 누구나 미국식 이름을 하나씩 갖고 있다. 미국 고객이 전화를 하면 "네, 제임스입니다. 뭘 도와드릴까요" 해야 하기 때문이다. "네, 크리슈나무르티 탄드라 기탄잘리 바가바드입니다" 할 수는 없는 일. "외국인 뒷치닥거리하는 노동 착취 산업" 일은 힘들어도 미국 회사의 고객 상담원은 인도 젊은이가 선망하는 직업이다. 인도의 평균 임금을 훨씬 넘는 급여가 그 주 이유. 따라서 점점 더 많은 젊은이가 외국 회사의 아웃소싱 부서로 몰려들고 있고, 경쟁도 치열하다. 한 회사의 직원 채용에서는 24명을 뽑는 자리에 지원서가 1천600장 들어왔다. 지원자의 1.5%만 뽑는 셈이니 67대 1의 경쟁율이다. 이미 쓸 만한 인도인은 다 쓰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미국 기업들이 이제 다른 나라로 눈을 돌릴지도 모른다는 보도도 나온다. ![]() 한편, 이렇게 외국 기업의 뒷치닥거리나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반성도 인도 안에서 나오고 있다고 한다. 인도 최고의 젊은이들이 전화로 고객 상담이나 하는 일에 빠져드는 것에 대한 반성이다. 어떤 인도인은, 미국 기업의 고객 상담 센터는 스스로나 나라를 위해서 큰 일을 할 수 있는 인도 젊은이들의 재능과 에너지를 빨아먹고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노동 착취소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외국 기업이 인도에 들어와 고용을 늘리며 구매력을 갖도록 해 놓고, 그 구매력으로 자기네 물건을 사도록 하는 자본주의 사이클을 충실하게 돌리고 있음을 잘 파악하고 있다. 인도의 고객 상담 센터에서 벌어지는 일을 자세히 취재해 쓴 책으로, 인도의 베스트 셀러가 된 체탄 바가트(Chetan Bhagat)의 <고객 상담 센터의 하룻밤> (One Night @ the Call Center)에는 이런 인식이 잘 나타나 있다고 한다. 바가트는 책의 한 주인공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건 멍청한 백인들이 생활을 제대로 해나가도록 도와주느라 젊은 세대 전체가 밤을 새우고 있는 꼴이야." 바가트의 책에서는, 말도 안되는 사소한 주장을 끝없이 늘어놓는 미국 고객에 응답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인도 젊은이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고 한다. 아웃소싱 직종에 채용되는 인도인은 통상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뒤 현직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중에는 다음과 같은 '정신 교육'도 있다. 교육 강사: "여러분이 앞으로 기억해야 할 공식이 하나 있습니다. 35=10. 35는 10과 같다! 똑똑히 기억하세요. 서른다섯 살짜리 미국인의 지능은 열 살짜리 인도인의 그것과 같습니다. 미국인은 멍청해요. 그냥 그 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고객과 상담 전화를 하면서 분통을 터뜨려서는 절대 안됩니다." 미국 고객의 불만도 만만치 않다. 인도의 상담원들이 전문적이지 않을 뿐더러, 액센트가 심해 말조차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고객 상담 부서를 인도로 아웃소싱한 대표적 기업 중 하나인 델 컴퓨터의 고객 상담 페이지나 제품 사용자 리뷰는 한때 인도인 상담원에 대한 불만으로 미어터졌었다. 이유는 상담원들이 제대로 훈련 받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제품에 대해 잘 모르며, 영어가 서툴 뿐 아니라 액센트가 강해서 무슨 말 하는지 도저히 알아먹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빗발치는 불만에 견디다 못한 델은 상담 부서 중 일부를 다시 미국으로 옮겨 왔다. 그러나 인도의 아웃소싱 산업은 확대 일로에 있고, 똑똑한 인도 젊은이들은 여전히 불을 찾아 몰려드는 나방처럼 밤에 불이 훤히 켜진 콜 센터로 밀려든다. 인도 경제가 성장하면서 세계 체제로 편입되는 한 과정이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도의 임금이 빠르게 상승하고 있어, 저임금에 기반한 아웃소싱 대상지로서의 매력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 수 없다. 어느 순간, 인도는 자기네 젊은이에게 스스로의 산업을 일으켜 가꾸는 일을 맡기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급성장하는 경제 단위로서, 자생력 있는 체질을 미리 닦아 두지 않으면 나중에 힘들 게 뻔한 일이다. 어쨌거나, 내 전화를 받은 인도인이 35=10의 공식을 떠올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미국인도 아닌데 너무하잖아...), 어쨌든 전화로 한참 귀찮게 한 일이 나중에 보니 좀 후회된다. 심슨 그림: The Simpsons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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