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에 뒤통수 맞은 재벌 by deulpul

한미 FTA, 잘 알고 계십니까
"난 경제학자인데도 한미 FTA 추진 사실 몰랐다"
이래도 한-미 FTA 할래?
FTA 지지하던 전경련, 미국에 뒤통수?

재벌들이 좀 머쓱하게 됐다. 그동안 막연히 한미 FTA 성사되면 수출 늘어나고 기업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미국과 정부가 추진하는 FTA를 밀어주었는데, 갑자기 미국으로부터 철퇴를 맞고 보니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실은 갑자기 철퇴를 맞은 게 아니라, 미국은 처음부터 날이 시퍼런 칼을 들이밀고 있었다고 한다. 정부가 공개하지 않아서 재벌도 모르고 국민도 몰랐을 뿐이다. 미국의 의도가 공개적으로 드러난 마당에, 하던 굿판 집어치울 수도 없고 계속할 수도 없어 엉거주춤한 대기업의 모습이 딱하다. 이에 대해 전경련이 내놓은 "우리 현실도 무시한 요구며 전례도 없다"는 주장도 볼멘소리처럼 들린다. 일단은 정부가 앞서서 막아주고 있는 상황인 것 같다.

전에도 인용한 자료지만, 정부의 FTA 추진에 모호한 이론적 근거를 대주고 있는 인하대 정인교 교수가 산업자원부에서 발표한 자료(pdf 문서)를 보면, 무역협회 소속 기업인의 77%가 한미 FTA가 필요하다거나 이에 적극 찬성했는데, 이들은 그 이유로 '관세 철폐로 인한 대미 수출 증가'를 들었다. 미국에 수출되는 한국 제품에 붙는 관세는 이미 낮은 터라, FTA 결과 그것이 없어진다고 해도 효과는 거의 없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수출보다 수입이 크게 늘어날 것도 뻔하다. 정교수 자신도 같은 자료 두 쪽 앞에서, '대미국 무역 수지는 악화될 가능성'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도 기업가들은 그저 주먹구구 희망사항에 기대온 것이다. 누구나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잘 모르는 상황에서는 더욱 더.

전경련을 비롯해 기업가 단체에는 굵직한 연구소들이 꽤 있다. 여기는 뭐 하고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들은 자기네 사활이 걸렸을지도 모르는 사안에 대해 들여다본 적도 없었던가? 정말 FTA가 되면 수출이 늘어나는지, 한국에서 기업 하기가 더 좋아지는지, 박살나고 개피보는 쪽이 누가 될 것인지, 정부에 뭘 요구해야 할 것인지 살펴본 적도 없단 말인가?

재벌이 한국 경제에서 긍정적인 역할 만큼 부정적인 역할을 해온 것은 명백하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의 힘을 빌어 재벌을 개혁하랴? 고양이 쫓기 위해 호랑이 불러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한 기사에 따르면 "공정거래위 관계자는 “미국 산업계와 의회가 한·미 FTA 협상 전에 미 정부대표단에 그런 것을 요구해왔다”면서 “그쪽 입장은 한국시장은 재벌 때문에 시장진입이 어려우므로 특별한 조치를 취해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라고 한다. 다른 기사에서는 "이는 ‘재벌의 경쟁제한적 행위에 대한 미국 업계의 우려를 해소하기 위한 요구’라고 외통부는 해석했다"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미국의 재벌 규제 요구는 철저히 미국 기업의 주장을 반영한 것이다. 한국에서 재벌이 따먹고 있는 과일을 빼앗아 먹겠다는 의도가 뻔하다.

미국 기업은 정부와 협상팀을 끌고 가고 있다. 각 산별 이익단체가 제각기 목소리를 내면서, 자기네 이익을 관철시킬 방안을 정부와 협상팀에 밀어넣고 있다. 정부와 협상팀은 이를 적극 수용하여 어리벙벙한 한국을 몰아친다. 반대로 한국 기업은 정부 눈치만 보고 정부에 질질 끌려다닌다. 제 목 조르는 일인줄도 모르고 좋다고 열심히 하잔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느끼지도 못한다. 무엇보다, 왕과 조정이 신나서 벌이는 일에는 같이 나서서 장단을 맞춰주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는 것이 한국 기업의 존재 방식이다.

무소불위 군사독재 시절도 아닌데, 왜 경제는 정치에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가? 심지어 저희들의 밥줄이 달린 일인데도 말이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잡아 족칠 수 있는 건수를 항상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법 다 지키면서 기업 어떻게 하냐" 한다. 기업 쉽게 하려고 법 대신 기름칠로 기업 경영할 수도 있지만, 정부가 수틀리면 목 날아가고 쪽박 찰 각오도 해야 한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고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법과 규칙을 제대로 지키는 투명한 경영을 하지 않는 한, 털어서 먼지가 세 포대쯤은 나오는 한, 기업이 정부에 대해 제 목소리를 낼 가능성은 별로 없다. 애초에 탄생과 성장의 태반 자체가 정부 호주머니였던 재벌들에 대해서는 그럴 가능성이 영원히 없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왕회장이 생각했던 대로, 스스로 대통령이 되어 경제 권력을 정치 권력으로 전화시키지 않는 한.

트랙백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TrackbackURL : http://deulpul.egloos.com/tb/1409278 [도움말]

덧글

  • 덧말제이 2006/09/09 14:58 # 답글

    이 기사 들으면서 재벌은 어떤 심정일까 싶었습니다.
    그러게 한 나라에 사는 동족이야 어찌 되건 말건 나만 이로우면(그나마도 바보처럼 계산한)의 자세를 지니는 게 아닌데 말입니다...
  • 메르키제데크 2006/09/09 21:47 # 답글

    속성상 실무진이나 연구진들은 "말은 못했지만 내 이럴줄 알았지" 하면서 땅을 치고 있을지도요.
  • 아우라 2006/09/10 04:45 # 답글

    대정부 반대운동들을 가끔 했었지만 사실 한-미 FTA 반대운동처럼 너무나 명확한 논리적 우위에서 참여해본적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즉 애초부터 관심있는 자들의 싸움에선 승부가 났었지요. 문제는 관심없는 자들, 즉 자세한 사항을 모르고 여론조사하면 찬성표 던지는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입니다. 일단, 재벌들은 쌤통입니다...^^;;
  • 가하 2006/09/10 13:02 # 답글

    재벌이 부정적인만큼 긍정적인 역할도 하고 있고, 특히나 재벌 개혁이란것이 이미 IMF때 지겹게 당한데로 산산히 갈라서 외국 금융자본에게 넘겨주는것이라면 진짜 우린 죽써숴 개주는꼴이죠. 아우라님의 기분은 저도 충분히 공감하지만 우리 고소할만큼 재벌이 당할때, 그 밑의 많은 노동자들이 얼마나 피해를 볼 지 끔찍합니다.
  • Hikaru 2006/09/11 13:47 # 답글

    항상 이런식이다보니 쓴 한숨만 나요. 어쨌든 전 한국인이니까, 우리나라가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굿판 한창이어도, 아니다 싶으면 때려쳐야죠.
  • deulpul 2006/09/12 17:39 # 답글

    덧말제이: 그러게 말입니다. 적당한 찬성을 보노라면, 이렇게 기업 환경에 광범위한 파장을 미치는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했는지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네요.

    메르키제데크: 정말 그랬기를 바랍니다. '속성상...' 이게 참 공사 다 망하게 만드는 요물단지죠...

    아우라: 그래서 교육과 홍보가 중요한 모양입니다. 뭐, '너무나 명확한 논리적 열위'에서 죽어라 밀어부치고 있는 정부도 핵심은 홍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죠...

    가하: 좋은 점을 지적해 주셨네요. 굵직한 기업이 무너지거나 외국으로 넘어간다면 그 자체로 국부의 손실이 됨과 동시에, 고용과 협력 산업(하청)을 비롯해 많은 부분에서 부정적인 파급 효과가 발생하겠죠. 그러니 좀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움직여줬으면 좋겠습니다. 아우라님 말씀은 '일단'으로 생각하자구요, 하하-. 더 중요한 이단, 삼단을 전제로 한.

    Hikaru: 네, 그 말이 정답 같네요. 잘 돼야죠. 못되면 나라만 거덜나는 게 아니라 당장 국민이 피폐해지니 말입니다. 안되면 때려칠 각오로 시작하는 것과, 무조건 성사시킬 각오로 시작하는 것은 과정과 결과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 기린아 2006/09/12 18:07 # 답글

    GM 대우의 사례를 보고 있으면, 꼭 외국 기업으로 넘어가는게 나쁜건지는 모르겠습니다. 국내기업들은 내친김에! 라는 형식으로 철저하게 구조조정을 해버렸지만, GM대우는 안그랬으니까요;;;
  • deulpul 2006/09/12 19:12 # 답글

    넵! 외국회사가 주인이 되면서 (노동자 시각에서) 거덜난 회사도 많이 있지만, 소유 주체가 바뀌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FTA와 관련해서는, 외국 기업의 주요 관심사가 비경쟁적 지위를 가지는 것이거나 최소한 지금의 한국 기업 활동을 규제하자고 하는 것이니, 한국 기업 처지에서는 손해고, 그것이 노동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도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세 가지 시각이 중첩되네요. 기업가 시각, 노동자 시각, 일반적인 국가 시각.
덧글 입력 영역


Adsen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