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놈! by deulpul

언젠가, 세상 일이 모두 싫고 주변이 모두 싫어진 때가 있었다. 주변이란 사람이다. 햇볕은 쨍하니 맑은 어느 늦가을, 노랗게 물든 잔디 위에 웅크리고 앉아서 오가는 사람을 보며, 하염없이 염증과 혐오를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퍼올리고 있었다. 누구나 그런 때가 있지 않나. 갑자기 막 폭발하고 싶을 때.

비등점에 이르렀을 때 끓는 사람은 차라리 낫다. 끓으면서 더이상 올라가지 않기 때문이다. 물이 100도에서 상승을 멈추는 것은 끓을 줄 알기 때문이다. 비등점에서도 밖으로 끓지 못하고 계속 안으로만 삭이다 보면, 온도는 끝없이 올라가고 나는 스스로 큰 내상을 입는다. 이웃과 세상과, 무엇보다 스스로에 대한 절망에서 비롯된 이러한 내상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된다.

이렇게, 가을잎 찬 바람에 흩어져 날리는 황금 물결 잔디 위에서 우울히 절망하다가, 문득 나는 유치하게도 한 깨달음이 머릿속을 관통하는 느낌을 받으며 갑자기 돈오돈수해버린 것이다. "미친 놈!"

아아, 세상에 미치지 않은 놈이 있던가. 배낭을 메고 씩씩하게 걸어가는 저 남자를 보라. 미친 놈! 머리를 숙이고 엄숙하게 걸어가는 저 남자를 보라. 미친 놈! 동무와 즐거이 이야기하며 밝게 웃는 저 여자를 보라. 미친 뇬! 무엇이 바쁜지 마구 뛰어가는 저 남자를 보라. 미치고 팔딱 뛰는 놈! 둘이 정다이 손을 잡고 나긋나긋 이야기하고 있는 저 앞의 남녀를 보라. 쌍으로 미친 놈들! 건너편 마당에서 공차기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라. 미쳐도 떼로 미친 놈들! 예쁘게 화장하고 화사한 옷 입고 종종걸음치는 저 여자를 보라. 미쳐도 곱게 미친 뇬! 내 가방 안에 든 책 속에서 형형한 눈빛을 내쏘고 있는 수염 덥수룩한 사내를 보라. 먼지 냄새 풀풀 나게 미친 놈! 무엇보다, 여기 앉아서 멀쩡한 남들 모조리 미쳤다고 생각하는 이 넘을 보라. 수퍼울트라초절정익스트림투엑스라지로 미친 놈!!

유치하나마, 그 뒤로 나는 꽤 편했다. 사람 만나기도 편했고 세상 살기도 좀 편해졌다. 그리고, 내가 이해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좀 불쌍해졌다. 이것은 외형상으로 어떠한 변화로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속으론 프로작 비스무레한 효과를 내었다.

미친 놈이라는 선고는 미치지 않은 그 어떤 상태를 전제로 한다. 정상이 없으면 미침이 없다. 미친 놈과 정상인 놈은 서로 상대의 존재를 자기 존재의 전제로 하는 켤레쌍인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 정상이고 어느 쪽이 비정상일 것인가. 정상인 놈의 시각에서 미친 놈은 미친 놈이지만, 미친 놈의 정신 세계에서는 정상이 모두 미쳐 돌아가는 세상일 터. 부시는 킴쫑일을 mad man이라고 하고 김정일은 부쉬를 전쟁狂이라고 한다.

유적 존재로서의 사람은 모두 눈 둘 코 하나 팔 둘 다리 둘을 공통으로 가진 존재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 인간에 철수며 영희며 이름을 붙이는 순간, 내게 다가와 꽃이 되지는 않더라도 65억 인간 중 유일무이한 특정 존재가 된다. 그래서, 자기가 낳아 이름 붙여놓고 "너는 대체 누굴 닮아서 그 모양이니?" 하고 말하면 안되는 것이다. 신생아에 이름을 붙이는 것으로써, 우리는 그를 인간 일반이 아니라 특정인 아무개로 용인하기로 하였으며, 아무도 닮지 않은 그 자체로서의 그를 받아들이기로 했기 때문이다.

친구 열 명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열 사람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부분은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것을 빼고 나면 매우 협소하다. 10명 각자의 세계를 각기 학교 운동장만하다고 하면, 그 열 집합이 중첩하여 만드는 교집합의 크기는 운동장 귀퉁이에 핀 제비꽃 이파리정도나 될까말까할 가능성이 크다.

열 사람까지 가지 말고, 두 사람만 있다고 가정해 보자. 교집합은 좀 커지겠지만, 여전히 겹치지 않는 부분이 훨씬 많다. 둘이면 오히려 더 어렵다. 둘 밖에 없으므로, 두 사람의 관심은 다른 데로 흩어지지 않고 상대에 집중되며, 따라서 겹치는 부분이 조금 커지는 대신 상대에 대한 기대와 그 불만족에서 오는 갈등도 훨씬 커진다. 이렇게 불만족과 갈등이 솔솔 피어오를 때, 이를 자꾸 골똘히 생각하다보면 풀이는 더 어려워지고, 분노와 서운함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마음 속에서부터 튀어나오려는 것이 생생히 느껴진다. 이럴 때, 돋보기를 치우고 졸보기를 들이대며, 일부러라도 멀리 떨어져 보는 것이다. 미친 놈! 하면서. 화성에서 온 저그 같은 넘! 금성에서 온 에일리언 같은 뇬! 하면서.

미친 놈을 놓고 자꾸 정상인이라고 생각하니 불만과 갈등이 쌓이는 법. 상대방을 미친 놈으로 간주하면 그를 이해하게 된다. 기실 여기서 '미쳤다'는 것은 나와 다르다는 것의 주관적인 표현일 것이지만 말이다. 상대를 미친 놈으로 간주하고 차이에 대해 궁리하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내가 그와 비슷하게 미치거나, 아니면 그가 정상으로 돌아온다. (영 안되는 경우도 있긴 있다.)

우연히 길을 걷다가 친구를 만난 것처럼 기쁘게 말하세요: 미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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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비단풀 2006/10/16 18:04 # 답글

    그대는 정녕 미친놈이오!
  • 덧말제이 2006/10/16 22:07 # 답글

    제게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사람들한테 명명하는 것과 비슷하네요.
    미친 놈! 이라는 다소 심오함까지 느껴지는 표현으로 가지는 않지만, 너무 말이 안 돼서 화가 나게 만드는 사람들, 사회적 통념으로부터 100만 광년쯤 떨어져 있는 사람은 그저 정상이 아니려니 하고 맙니다. 그러니 저러는게지 하구요.
    그러고 나면 같은 편까지 되주긴 어려울지 몰라도 그러려니 하게 되고, 화도 덜 나게 되고 그렇더라구요. 누군가에겐 저 역시 그런 존재일지 모르죠. ^^;
  • deulpul 2006/10/17 03:15 # 답글

    비단풀: 참으로 고맙습니다, 하하-. 언제 제대로 한번 미쳐봐야 할텐데 말입니다...

    덧말제이: 금성도, 화성도 아니고 100만 광년입니까. 정말 아무리 해도 assimilation 안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냥 미친 분들이라서 그렇습니다. 이런 분들 만나면 정말 미치고 환장하게 되죠... 광기의 사회적 확대 재생산이라고나 할까요.
  • 안(no) 수호 2006/10/17 17:00 # 삭제 답글

    그런데, "형형한 눈빛을 내쏘고 있는 수염 덥수룩한 사내" 라하면... 혹시 아직도 가방속에?
  • deulpul 2006/10/18 00:38 # 답글

    아뇨, 옛날 이야기입니다. 쥐라기나 백악기 정도인 것 같습니다.
  • 2006/10/22 22:34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지아쿨 2006/10/28 01:19 # 답글

    조금은 다른 이야기이지만, 개인적으로 미쳤다는 말 좋아해요.
    살면서 미쳤다는 소리 한 번쯤 안 들어보면 그 인생이 참 재미없을 것 같거든요.
    미쳤다는 건 그만큼 열중한다는 뜻도 있으니까요.
    무엇인가에 미친다는 거 꽤 멋진 일이잖아요. 물론 제대로 미쳐야 하겠지만요.^^;;
  • deulpul 2006/11/02 12:12 # 답글

    비공개님: 저런, 욕을 하시다니... 하하-.

    지아쿨: 정말, 제대로 한번 미쳐봐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됩니다만, 마음대로 미치기도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미치려면 좀 일찌감치 미쳐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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