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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풀검(Robert Fulghum)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고 고백한다. 그 고백이 큰 공감을 샀던지, 이런 제목을 타이틀로 내건 그의 책은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됐다. (나도 고백하자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다.)
유치원에서 배운 것만으로 세상을 살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특히 힘 있는 사람들이 유치원 다닐 만한 나이에 배운 세상살이의 원칙을 평생 잘 되새기며 산다면 세상이 지금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풀검의 성찰은 <명심보감>의 뜻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겠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얼마 전에 어떤 원로가 자신의 좌우명으로 <명심보감>의 한 귀절을 인용하시는 기사를 보았다. 정말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의 정신을 잘 보여주시는 사례가 아닐까. 그런데 풀검의 저 베스트셀러가 한국에서 출판되었을 때, 제일 처음 든 생각이 이거다: 유치원 안 다닌 사람은 어쩌나. 유치원을 다니지 않은 사람은 정말 알아야 할 것을 하나도 모르고 산다는 말인가. 에, 그러니까 풀검이 '유치원'이라고 한 것은 딱히 'OO유치원'의 유치원이라기보다 어릴 때의 기초 교육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 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제(All I Really Need to Know I Learned in Kindergarten)를 보면 풀검이 말하는 유치원은 킨더가든(kindergarten)이다. 직역하면 유치원이긴 하지만, 한국의 유치원을 상상하면 곤란하다. 한국의 유치원처럼 부모가 임의로 선택해 보내든지 말든지 하는 사설 교육기관이 아니라, 정식 공립 의무교육의 가장 낮은 단계, 말하자면 한국의 초등 1년과 비슷한 등급이다. 미국넘들의 초중등 학제(primary and secondary education)는 지역에 따라 제멋대로지만, 대개 K에서 시작해 12학년에서 끝난다. 그래서, 미국의 공립학교 교육 시스템을 흔히 K-12라고 표현한다. 만 5세(혹은 6세)부터 들어가는 킨더가든은 이 시스템의 가장 아랫 학년이 되며, 한국에서 의무 교육을 초등학교 1학년으로 시작하는 것과 유사하다. 정식 학교 교육이므로 수업 시간도 '유치원'보다 훨씬 길고 모든 것이 공식적이다. 킨더가든에 가기 전에 다니는, 한국의 유치원에 해당하는 것은 보통 프리스쿨(pre-school), 혹은 데이 케어(day care)라고 한다. 킨더가든을 '공립 유치원'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교육의 의무성이라든가 다음 학년과의 연계, 학교 교육 시스템 등 모든 점에서 한국식 유치원보다는 정규 의무 교육의 가장 낮은 단계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보다 1년 정도 먼저 학교 교육을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교육사적 이유도 있다. 어쨌든, 그러므로 풀검의 책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초딩 1년 때 배웠다'라고 해야 정확히 옮긴 셈이 되며, '유치원 안 다닌 사람은 어쩌라구, 초장부터 꽝?' 같은 쓸데없는 오해를 피하게 된다. 제목으로서의 맛은 좀 떨어지지만. 그럼 풀검이 유치원이 아니라 킨더가든에서 배운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무엇일까. 예컨대 다음과 같은 것들이라고 한다. 구분하자면, 1) 개인의 생활과 관련한 기초 사항 (손 씻기, 변기, 찬 우유, 균형 생활, 낮잠, 교통 질서), 2) 정리 정돈과 관련한 기초 사항 (제자리 놓기, 청소), 3)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관련한 기초 사항 (나누기, 페어 플레이, 안 때리기, 안 가져오기, 미안), 4) 나름 약간의 형이상학적 사항 (호기심, 모두 죽음, 관찰) 등으로 되어 있다. 음... 영어 단어 외우기, 1등 하기, 이런 건 없구나. 아이가 킨더가든에 들어가면 갑자기 학교와 집을 오가는 서류가 뭉텅뭉텅 늘어나기 시작한다. 그 중에 이런 것도 있다: "함께 보내드린 학교 핸드북을 잘 읽어보시고, 특히 '학생과 학부모의 권리' '학생의 의무' '학부모의 의무'에 대해 자녀와 토론하신 뒤, 이 서류에 사인해 돌려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래? 뭐라고 되어 있나 보자. 학생과 학부모의 권리: 1) 공짜로 교육 받을 권리, 2) 처벌을 받을 때 정당한 절차를 요구할 권리(이른바 due process), 3) 표현의 자유를 보장 받을 권리, 4) 프라이버시를 보호 받을 권리, 5) 차별을 받지 않을 권리. 학생의 의무: 1) 교육 과정에 열심히 참여할 의무, 2) 법과 규칙을 지킬 의무, 3) 자신과 남의 표현의 자유를 존중할 의무, 4) 불법적이고 위험한 물품을 피할 의무. 학부모의 의무: 1) 훌륭한 교육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교직원을 지원할 의무, 2) 학생에게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행동을 하도록 가르칠 의무, 3) 학생에게 법, 규칙,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도록 가르칠 의무, 4) 자율적이고 자기 통제적인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가르칠 의무, 5) 학생 지도와 관련하여 학교와 협조할 의무, 6) 학생의 학업과 활동에 관심을 기울일 의무, 7) 학생에게 질 높은 교육을 제공할 의무, 8) 학생을 학교에 제 시간에 꼭 보낼 의무. 강조는 내가 넣은 것이다. 음... 이제 정규 교육을 막 시작하는 초등 1학년, 실제로는 한국 초등 1보다 한 살 더 어린 그 아이들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하여, 꼭 토론한 뒤 사인해 오라며 나눠주는 이 권리며 의무를 보면, 미국넘들의 공립 정규 교육에서 강조되는 점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이런 원칙만으로도 세상 살기가 훨씬 편해지지 않겠나 싶다. 적어도, 펄펄 뛰는 애 옆에서, 우리 애 기죽이지 말라고 애보다 더 펄펄 뛰는 철딱서니없는 부모들은 좀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어디나 원칙이란 언제나 잘 지켜지지 않아서 원칙이기도 하고, 저런 원칙 있다고 미국넘들이 모두 착착착 풀검처럼 모범생으로 사는 것은 아니지만, 혹시라도 미국넘들의 기초 생활 윤리 부분에서 배울 만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저런 공립 교육의 정신 탓도 있는 것 같다. 한국에도 이 원칙 못지않게 훌륭한 원칙으로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많이 있다는 점도 다행스럽고. 이 글과 관련있는 글을 자동검색한 결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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