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상 위의 FTA by deulpul

인터넷서비스, FTA의 무풍지대인가?

한미 FTA가 지금처럼 미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타결되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한 가지 실감나는 시나리오. 미리 말하지만, 아래와 관련된 협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현재 상태에서 이건 그냥 시나리오임을 먼저 밝힌다. (다행히) 일이 이렇게 진행되지 않는다는 근거를 갖고 계시는 분이 있으면 알려주시면 좋겠다.

RIAA라는 악명 높은 단체가 있다. Recording Industry Association of America의 약자인데, 미국음반산업협회쯤으로 번역될 수 있겠다. 이 단체가 주로 하는 일은 미국의 대표적인 음반업자들을 위해 저작권을 보호해 주고 위반한 사람을 색출해 소송을 거는 것이다. RIAA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음반회사들이 다 포함되어 있으며, 미국에서 생산 유통되는 음악의 90%가 이 단체 회원사 몫이다. 독립적으로 발표되는 음반을 빼면 거의 다 망라되어 있다고 해도 되겠다.

RIAA가 유명해진 것은 정기적으로 저작권 위반자를 찍어내 거액 소송을 걸기 때문이다. 이 단체는 P2P등 인터넷을 통해 음악 파일을 올리고 내려받는 사람들을 감시하다가 정기적으로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협박 편지를 보낸다. 아무런 예고나 경고 없이 다짜고짜 소송하겠다는 편지를 받은 사람은 당황하기 마련. 소송 예정액은 보통 건당 1천만원이 넘는데, RIAA는 대부분 소송으로 가기 전에 적당한 정도의 벌금(200-500만원선)을 물리고 합의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그런데 RIAA가 확보하는 정보는 IP 정도이고, 구체적으로 그 아이피 사용자가 누군지 알아내려면 ISP, 그러니까 인터넷 사업자의 협조를 얻어야 한다. 기업의 영리를 위해 활동하는 단체(RIAA)가 요구한다고 해서 ISP가 가입자 정보를 함부로 내줄 리 없다. 협조해 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 RIAA가 법적 절차를 계속 진행하려면 법원으로부터 영장을 받아야 한다.

한미 FTA 협상 처음 시작할 때, 미국 담당자가 기자회견을 가지면서 음악 CD를 흔든 장면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지재권은 FTA 협상에서 주요 안건이지만, 지금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는 찾아봐도 나오질 않는다. 여하튼 이게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 요구대로 합의되었다고 해보자.

최근 한국에서 '미드' 열풍이 부는 것은 다들 느끼고 계실 것이다. 자, 이 미드를 어떻게 보느냐. 케이블에서도 볼 수 있고 DVD 몇 장 짜리 세트를 돈 주고 사서 볼 수도 있지만,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보시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일단 현실을 인정하고 이야기해 보자.

미국에서 드라마를 제작하고 그 지적재산권을 가지고 있는 회사, 예컨대 FOX나 HBO는 이 상황을 눈여겨 보며 문제를 삼기 시작한다. 미국 회사가 그래봤자지. 지가 한국 사람을 어떻게 하것어. 어떻게 찾아낼 것이며 찾아낸다고 해서 한국까지 찾아와서 잡아가것어, 어쩔 것이여. 배 째라 그래!

지금까지는 그랬다.

앞으로는 진짜로 배 짼다.

미국 회사는 한국 대리인을 통해 위반한 사람을 찍어내기 시작한다. IP를 입수한 뒤 가입자 신상 정보를 하나로통신 같은 인터넷 회사에 요구한다. 혹은 PDBox, ClubBox, 무슨 구리 같은 파일 공유 회사의 가입자 정보를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미국 ISP 회사는 법원의 영장이 있어야 고객 정보를 내주지만, 한국 ISP 회사나 파일 공유 사이트 회사는 FTA 조항 때문에 영장이고 나발이고 고객 정보를 내줘야 한다. 협조하지 않았다가는 미국 기업 이익을 침해했다는 명목으로 천문학적인 금액의 벌금을 얻어맞는다.

위반자 5,000명의 명단을 확보한 미국 회사는, 개개인에게 수백만원, 혹은 수천만원의 소송을 걸겠다는 통보를 내용증명으로 보낸다. 액수가 고액인 것은 징벌적 배상의 의미를 담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징벌적 손해배상 같은 거 없었다. 물론 몇 백만원을 내면 봐주겠다는 대안을 함께 제시해 줄지도 모른다. 이에 불응하면 정식 소송을 걸텐데, 그 담당 법원은 미국 법원이 될지도 모른다. 판결이 어떻게 나올지는 뻔하고, 위반자는 수백만원, 혹은 수천만원을 물어야 한다. 아니면 사회 생활 모두 접고 잠적하든지. 아니면 한강으로 뛰어들든지.

한국 음반이나 영상 관련 단체도 지재권을 지키기 위해 가끔씩 조처를 취하지만, 처벌의 엄중함에서 미국 회사나 단체에 비하면 차라리 애교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영파라치나 운영하는 구멍가게식 단속에 댈 게 아니다.

미드만 그럴 것인가. 지적재산권이 미국 회사에 있는, 그러니까 지금 유통되는 거의 모든 영화나 팝송이 모두 이런 상황에 돌입한다. 많은 분들이 지적하시듯, 한국은 미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엄청난 시장이다. 저작권 단속에 적극적이지 않은 한국의 라이선스 회사를 제치고 미국이 직접 달려들 수 있는 시장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에서 고용량 파일을 저장, 공유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국 회사는 모조리 소송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 회사들이 판단하기에, 이 서비스가 실질적으로 영화, 음악 같은 파일의 불법 공유에 쓰이고 있다고 볼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소송액은 해당 회사들이 모두 망하게 되기에 충분할 정도일 것이다. 소송이 걸리면 이 회사들은 항변하겠지만, 미국 법원이 이를 들어줄 리는 없다. 한국 법원이라도 미국의 압력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면죄부를 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저작권 보호 대상이 인터넷 공유를 통해 불법 유통되는 것을 옹호하자는 것이 아니다. FTA로 인해 한국인은 한국 정부를 건너뛰어 곧바로 미국 기업 이익의 법률적 타겟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한국의 특수한 사정, 이딴 거 없다. 한국적 정서, 이딴 것도 없다. 걍 미국표 굴다리 밑으로 10초 안에 열나게 헤쳐모여야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개입할 부분은 별로 없다. 그냥 미국 회사가 요구하는 대로(다시 말하면 FTA 협정에 명기된 대로) 내용 증명이나 보내주고 벌금이나 받아다주는 것 밖에는. 자국민 보호? 하고 싶지만 못하게 되어 있다.

이런 걸 무슨 한국 법률 체계가 정비되는 것쯤으로 오해하시는데, 미국넘들이 뭐가 아쉬워서 한국넘들 법률 체계를 정비해주기 위해 머리 싸매고 한국넘들과 밀고당기며 박터지게 고생한단 말인가. 미국이 한국의 국내법을 바꾸고자 하는 것은, 오로지 미국의 이익을 한국에서 실현하기 쉽도록 하자는 것으로 보아야 상식이 아닌가. 론스타에서처럼, 담당자에게 떡고물 한덩이씩 떼어주고 로비하여 거저먹듯 주워먹어도 감사원 같은 넘들이 달라붙어 징징대지 못하도록, 혹은 좀더 FTA틱하게 말하자면 '미국 투자자의 이익을 보호하도록' 한국 법을 구석구석 손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미국 기업들을 등에 업고 협상에 나서고 있는 미국의 일관된 자세라고 보아야 상식이 아닌가.

자, 그럼 혹시 미국의 어떤 넘들이 한류를 너무 좋아하여, 비 음반을 무단 카피하여 뿌린다고 쳐보자. 이왕 상상하는 김에, 비 뿐아니라 눈, 우박, 장대비, 폭우, 폭설 따위 가수들도 모두 미국에서 잘 나가게 되어, 미국넘들이 불법 유통한다고 해 보자. 그럼 한국 정부나 한국 음반회사가 똑같이 미국 정부를 제끼고 미국넘들을 대상으로 직접 이익 소추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일이 이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NAFTA를 통해 잘 알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불법 유통을 보호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한미 FTA는 남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불평등한 FTA는 쇄국이냐 개국이냐 같은 이데올로기 다툼도 아니고 먼 미래의 문제도 아니며, 나와 상관없는 시골 농촌 할아버지 누군가만의 문제도 아니다. 체결되는 순간 바로 내 앞으로 쑥 들어올 칼날 같은 것이다. 그만큼 폭넓고 심대하다. 엣다 모르겠다 하기 전에, 좀더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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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TA와 IT 2007/03/28 15:19 #

    오늘 FTA 지재권 관련 기사를 보고 생각나서 포스팅. 한미 FTA 체결 이후 IT 업계의 변화… 1. 일방적 구제절차 A: B 회사는 우리가 개발한 암호화 알고리즘 라이브러리를 몰래 도용해서 쓰고 ...... more

  • [단상]IT영역은 FTA의 무풍지대일까요? 2007/04/02 19:42 #

    노대통령의 하반기 주력아이템(?)이라고 하는 한/미 FTA가 오늘 1시경에 정식으로 타결되었다고 합니다. 어떤분들은 4.2 조공이다.. 어떤분은 G10 으로 진입하기 위한 한발자욱의 전진이다라고 이야기하는데.. 솔직히 어느분의 손을 들어줄지는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흐른뒤에 역사가 판단하겠지만.. 현재로서는 씁쓸한 마음이 조금은 남아있네요.. 여하튼.. 제가 속해있는 IT영역은 이미 국경없는 총싸움이 벌어진 곳이라서 큰 변화가 있을가라고 생각은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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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메르키제데크 2007/03/28 14:04 # 답글

    그러고 보니 한미 FTA과 더불어 JASRAC(일음저협)도 국내를 단단히 노리고 있지요. 뒷일이 어찌될지 모르겠습니다.
  • 2007/03/28 19:58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07/03/29 04:26 # 답글

    메르키제데크: 뒷일이 어떻게 될지 저도 참 걱정입니다.

    비공개님: 네, 정말 고맙습니다.
  • 2007/03/29 22:36 # 삭제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07/03/30 05:13 # 답글

    네, 출처를 밝혀주시면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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