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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저녀 단상 3 : 루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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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외 선생님은 말하자면 담임 선생님과 친구였다. 두 분이 어떻게 친구인지, 원래부터 친구였는데 우연히 같은 마을에 살게 된 것인지, 같은 동네에서 비슷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친구가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여하튼 소년의 초등 3년 담임 선생님과 새터 마을에 살던 과외 선생님은 연배마저 40대 중반으로 비슷한 친구였다.
두 분이 친구인 것을 알게 된 것은, 어느 일요일 오후에 두 남자가 마주 앉아 소주를 마시는 것을 보고 나서였다. 동네 수퍼 앞마당에, 킨 사이다 상표가 그려진 패러솔이 삐딱하게 꽂힌 둥그런 철제 탁자 앞에 앉아 두 사람은 소주를 마셨다. 당시는 지금처럼 학교가 끝나면 무슨무슨 학원을 줄줄이 거쳐야 하는 사교육 번성 시대가 아니었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기껏 초등 3년짜리들을 앉혀놓고 무슨 중뿔난 영재 교육이나 하겠는가. 구구단이나 한 번씩 더 외우게 하고, 열 문제짜리 받아쓰기나 비슷한 말, 반대말 쓰기 시험을 매번 꼭꼭 치러야 하는 정도의, 말하자면 공부 시간의 절대량을 조금 늘리는 정도의 사교육이었겠지. 같은 학년 여남은 명 꼬맹이들은 그래도 신이 나서, 일주일에 세 번씩 과외 선생님 댁을 찾아 갔다. 신나는 이유는 여럿이었는데, 그 중 하나는 도무지 출처를 알 수 없는 엄청난 스케일의 옛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공부가 지루해지거나 진도가 너무 많이 나가면, 소년을 비롯한 꼬맹이들은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선생님을 졸랐다. 선생님은 처음에는 언제나 안된다고 거절했지만, 또 언제나 못 이기는 척하고 이야기 보따리를 끌러 놓으셨다. 그 보따리 속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소년과 친구들은 듣도보도 못한 흥미진진한 이야기여서,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듣다 보면 과외 끝나는 시간이 금방 왔다. 선생님의 이야기 속에서는 장풍을 날리는 거사며 천근짜리 언월도를 지게 작대기 휘두르듯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장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구구단 낭송 소리 청아하게 울러퍼지던 선생님의 집 작은 골방은 금세 흙먼지가 자욱하고 피비린내 나는 무대로 바뀌었다. 선생님의 옛날 이야기의 구조며 등장 인물이 무협지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것은 소년이 고등학생쯤이나 되어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이런 옛날 이야기도 좋았지만, 소년이 신이 나서 일주일에 세 번씩 과외 선생님 댁으로 달려간 데에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바로 단발머리 소녀였다. 다른 반이어서 평소에는 잘 만나기 어려운 단발머리 소녀가 함께 수업을 들었던 것이다. 소녀는 언제나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동글동글하게 살짝 튀어나온 앞이마를 조금 가리다가 귀 옆을 덮고 목덜미 쪽으로 가지런하게 흘러내린 단발머리는 소녀와 참 잘 어울렸다. 차분한 머리처럼 소녀도 언제나 차분하고 조용했는데, 그래서 조숙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단발머리 소녀는 공부를 할 때도 차분해 보였고, 운동장에서 줄을 맞춰 서서 체조를 할 때도 조용해 보였다. 쉬는 시간에 동무들과 고무줄을 하며 "무찌르자 공산당 몇 백만이냐..." 하고 노래하면서 팔랑팔랑 뛸 때조차 차분하고 조용하게 보였다. 과외를 하던 골방에는 길다란 앉은뱅이 책상이 앞 뒤 두 줄로 놓여 있고, 그 앞에 칠판이 매달려 있었다. 꼬맹이들은 대여섯 명이 앞 줄에 앉고, 나머지 대여섯 명이 뒷 줄에 앉았다. 방이 좁았으므로 아이들은 무릎을 꿇고 서로 다닥다닥 붙어 앉았다. 그런데 이 단발머리 소녀는 자주 소년의 옆에 앉았다. 소년이 먼저 자리를 잡으면 단발머리 소녀가 옆에 와 앉을 때도 있었고,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하여, 두 사람은 서로 반도 다른 주제에 얼추 짝지처럼 되어 가고 있었다. 아카시아 향기가 코를 찌르던 즈음의 어느 날이었다. 선생님은 칠판 가득 문제를 내주고 다른 방으로 건너가셨다. 아이들은 콧물도 훌쩍여 가며 장난도 쳐 가며, 공책에 열심히 문제를 풀었다. 앞 줄에 앉았던 소년은 문제를 다 풀고 나서 오른쪽에 앉은 단발머리 소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소녀는 짐짓 모른 체 하고 공책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갑자기, 소녀를 바라보고 있는 소년의 눈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소녀의 머리 뒤로 알 수 없는 빛이 비쳐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빛은 점점 강해져서, 고개를 숙이고 차분하고 조용하게 문제를 풀고 있는 소녀의 단발머리를 환하게 비추었으며, 그 너머로 다른 아이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밝은 빛 속에서 깜빡깜빡하는 소녀의 검은 눈은 더할 수 없이 착해 보였고, 앙다문 입술은 더할 수 없이 지혜로와 보였다. 불과 50센티도 떨어지지 않은 소년의 코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현기증을 느낀 소년은 고개를 돌려 칠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오른손을 소녀의 무릎 위에 가만히 얹어 놓았다. 소녀는 고개를 돌려 잠깐 소년을 바라보다 다시 공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문제를 푸는 단발머리 소녀의 얼굴이 점점 빨개져 갔다. 소년의 손에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단발머리 소녀 김정숙이 전학을 간다는 소식도 과외를 통해 알려졌다. 그가 자기네 반에서 마지막으로 인사를 했다는 날, 소년은 방과후에 텔레비전으로 황금사자기 고교 야구 결승전을 보다가, 먼지 폴폴 날리는 신작로를 한참 걸어서 단발머리 소녀네 집을 찾아갔다. 소녀의 어머니가 "친구 왔나? 잠깐 기다려라" 하시고, 조금 있다가 소녀가 나왔다. 잿빛 깡통치마를 입고, 등에 서너 살 쯤 되는 동생을 포대기로 감싸 업고 있었다. 여전히 차분하고 조용했는데, 그날따라 더욱 새침한 것도 같았다. 서울로 전학을 간다고 했었던 것 같다. 모두가 부유하던 시절이었다. 소년과 소녀는 잠깐 멋적게 서 있다가, 잘 가라, 잘 있어라, 편지 써라, 이런 말만 하고 헤어졌다. 단발머리 소녀의 집을 나오다가 돌아보니, 소녀는 동생을 업은 채, 그 착한 눈으로 먼 산을 보고 있었다. 돌아오는 신작로 길 위로 미루나무 가로수 그림자가 길게길게 늘어졌다. 멱 감던 개울을 따라 해가 지고 있었고, 소년의 마음도 알 수 없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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