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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이 좀 점잖지 않지만, very의 뜻을 very very 강조하려다 보니 저렇게 됐다.
이 글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의 친구 중에는 한때 영화를 공부하던 이가 있다. 이론이 아니라 제작 쪽이었다. 그 쪽에서 장래를 펼치지는 않았으나, 이 때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다큐멘터리도 뚝딱 만들어내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돈도 좀 벌었지. 맞던가? 한때 이 친구와 영화를 보러 종로 거리를 쏘다닌 적이 있다. 그렇게 해서 본 영화 중 두 개. 하나는 중국 영화였는데, 제길, 영화가 온통 형이상학적이어서, 좋게 말하면 다양하게 해석할 여지를 남긴 명작으로도 볼 수 있었고, 나쁘게 말하면 장면 하나하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아, 마치 수많은 수수께기를 풀어야 하는 것처럼 골치아픈 영화였다. 말하자면, 영화 끝나고 나서 술깨나 퍼먹어야 하는 영화였던 것이다. 이 친구와는 소설책을 하나 읽어도 열띤 토론을 벌이기 일쑤였으니, 이 영화 제대로 걸렸다. 영화가 끝나고 소줏잔을 놓고 영화 이야기를 하는데, 그의 해석과 나의 해석이 아주 달랐다. 때는 바야흐로 연부역강하던 어린 시절. 이런 건 그냥 못넘어 가지. 술집을 세 집이나 전전하면서 격론을 벌이다가 결국 그가 두 손을 들었다. 나의 해석(?)이 이긴(?) 셈이었는데, 지금에야 고백하는 바이지만, 나는 사실 그 영화를 두 번째 봤으며, 미리 과외를 받고 예습을 하고 나왔던 것이다. 그럴려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그 영화를 보기 몇 주 전, 휴일에 대학로를 전전하다가 우연히 한 선배를 만났다. 그와 함께 동숭아트센터에 들어가 본 영화가 바로 그 영화. 날카로운 시각과 예민한 문화적 감수성을 갖고 있던 그 선배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 나름 의미를 짚어 주었는데,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받은 과외 지도 덕분에, 나는 친구와의 밤샘 토론에서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미안하다 친구야, 늦었지만 고백한다. 두 번째 영화는 앞의 것과는 정반대로 시시껄렁한 현대 액션물이었다. 옆에서 영화를 보던 친구가 갑자기 무릎을 치며 감탄을 했다. 주인공이 아스팔트를 달려가는데, 카메라 앵글이 땅 깊은 곳에서 하늘을 향해 잡는 바람에 주인공이 거인처럼 압도적인 존재로 비쳤다. 친구가 감탄한 것은, 휙 지나가는 2, 3초짜리 장면을 잡기 위해 땅을 파고 (뭐... 혹은 맨홀 뚜껑을 열고) 그 밑에 카메라가 들어갔으리라는 점 때문이었다. 나로서는 깜짝 놀랄 일이었다. 그런 생각은 죽었다 깨도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 일은 나에게는 코페르니쿠스적 인식의 전환과도 같았다. 그 전에 나는 영화의 줄거리, 기껏해야 배우의 연기 정도만 보았지, 촬영 현장의 연출에 대해서는 전혀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극장만 아니었으면 친구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유레카!!" 하고 뛰어다녔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흔히 종합 예술이라고 한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 올라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이 말이 정말 실감난다. 한 문화 상품을 만들어 내는 데에 이렇게 많은 전문가가 집단으로 참여하는 일도 드물 것이다. 이런 사정을 잘 알면서도, 우리는 영화가 종합 예술이라는 것을 곧잘 잊는다. 영화는 상품으로서든 예술품으로서든 수많은 서브 장르의 집체물이라 할 수 있다. 영화의 감동을 만들어내는 것은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의 머리 속부터 크레인을 움직이는 기사의 손가락까지가 모두 합쳐져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장에 있어보지 못한 우리 비전문가들에게는 줄거리가 가장 먼저 보인다. 그리고 불행히도 대부분의 경우 거기에서 끝난다. 물론 줄거리는 한 영화를 탄생시키는 기초요 핵심이다. 비록 전략서이긴 하지만, 심산의 시나리오 쓰기 책을 읽으면서, 얼핏 단순해 보이는 장면 장면마다 수많은 계산과 고려가 들어 있으며, 이것이 치밀하게 짜여 스토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알고 새삼 놀랐다. 그러나 영화는 소설이 아니고 만화가 아니므로, 줄거리로만 존재하고 승부하는 예술이 아니다. 최종 생산물로 보면 줄거리는 분명 영화의 일부다. 영화의 시대를 이끌어 온 기라성 같은 작품들을 보라. 이야기가 탁월하고 재미있어서 그렇게 된 것인가? 그보다는 종합 예술 매체로서 영화가 갖는 특수성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이루어 온 것 때문에 찬사 받고 기억되는 것이다. 내러티브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모든 장르, 예컨대 소설, 만화, 영화, 연극 등을 관통하는 기본 요소라면, 이것을 시청각적으로 어떻게 표현할까는 영화를 다른 장르와 구별되도록 하는 핵심 요소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야기임에도 영화로 새로 만들어지면 관객이 찾는 이유다. 스토리가 영화의 전부라면, 세익스피어 원작의 영화는 나오지도 못할 것이고, 60년대 작품을 새로 리메이크하는 제작자는 미친넘 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혹은, 세익스피어 원작을 각색해 영화로 찍으면 무조건 명화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화사에서 빛나는 명작 중에는 고전적 할리우드식의 서사 구조를 뛰어넘어, 내러티브는 없이 플롯만 있는 영화도 적지 않다. 아주 골치아픈 영화들이긴 하지만. 물론 이런 영화들은 애초에 그렇게 하기로 예정하고 그렇게 된 것이다. 할리우드식 스토리를 만들어 가려는데 그게 안되면 안습이다. 내가 여기서 하고 있는 말은 내러티브만이 영화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뿐이다. 나도 가끔 여기서 영화에 대해 쓰면서 비슷한 잘못을 반복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영화의 줄거리라는 일부로 영화 전체를 재단하는 잘못 말이다. 이것은, 노래도 가사가 좋은 노래를 주로 좋아하는 내 취향과도 관련이 있지만, 그보다는 내가 제작 현장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눈에 보이는 것, 알 수 있는 것만 보는 셈이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작은 부분인가. 좀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엔딩 크레딧에 등장하는 참여자 수백 명 중에서 줄거리를 만드는 한 명이거나 기껏해야 서너 명이다. 이렇게 다양한 서브 장르의 전문가가 모여서 만든 매체를 그 중 한두 기준으로만 평가하는 태도는 당연히 군맹무상,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결과를 낳는다. 보는 사람마다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하되, 그 어느 것도 부분에 지나지 않을 수 있는 결과 말이다. 사실 원천적으로 종합 예술인 영화는, 이처럼 보는 시각이나 취향과 사전 정보량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받을 것을 숙명으로 하고 있는지 모른다. 따라서 다양한 해석, 선호의 차이 자체를 문제라고 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장님 하나가 다른 장님을 모두 깜깜 절벽으로 여기고 깔아뭉개는 상황이라고 해야 하겠다. 저도 장님일 뿐 아니라, 영화 자체가 그렇게 되도록 생겨먹은 물건인데도 말이다. 코끼리 다리를 만지던 장님이 "코끼리란 기둥처럼 생긴 동물이군" 하는 데까지는 좋으나, "코끼리란 뱀처럼 생긴 동물이지"(꼬리 만진 장님), 혹은 "코끼리란 항아리처럼 생긴 동물이거든"(배를 만진 장님)이라는 주장을 모두 틀렸다고 강변한다면, 이것은 이미 영화의 문제가 아니다. 영화가 종합 예술이라면, 어디까지가 영화인가. 영화 이야기는 아니지만,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시사점을 줄 수도 있다. 현대 전위 음악가 존 케이지의 '4분 33초'. 무대에 등장한 연주자는 피아노 앞에서 4분 33초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다가 퇴장한다. 그 동안 관객은 처음에는 조용히 기다리다가 의아해 하고 웅성웅성한다. 헛기침도 하고 옆사람과도 속삭인다. "뭔 일이래?" 케이지에 따르면, 관객이 만드는 이러한 소음이 바로 이 곡이라고 한다. 음악으로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영화에 대해서는 훌륭한 비유가 될 듯싶다. 즉슨, 영화의 존재는 스크린에 걸리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반응까지로 연장되는 것이다. 영화가 나오면 박스 오피스 몇 위, 벌어들인 돈 얼마가 기록되고, 해마다 영화 흥행작을 꼽는 것은 단순히 어떤 영화가 얼마나 돈을 벌었나를 따져 보자는 것만은 아니다. 관객의 반응이 그 수치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같은 '피드백'도 영화를 평가하는 데서 빠뜨릴 수 없는 한 부분임은 명백하다. 피드백은 공짜 표로 시사회에서 영화를 보는 비평가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돈을 주고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서도 나오는 것이다. 관객의 반응이나 흥행 성적이 설령 영화 자체를 평가하는 객관적 기준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그 영화가 존재하는 시대의 요구를 측정하는 기준이라는 점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베스트셀러 책이 좋은 책이 아닐 수도 있듯, 신춘문예 당선 소설이 좋은 소설이 아닐 수도 있다. 베스트 셀러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듯, 신춘문예 스타일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줄거리로 영화를 보는 사람이 있듯, 그래픽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영화처럼 보는 사람마다 평가가 다른 예술이 어디 있나. 전에 썼지만, 같은 자리에 앉아서 보고 나서 한 사람은 쓰레기로 치부하고 한 사람은 명작의 반열에 올려두는 것이 영화다. 이것은 영화를 보면서 사실은 자신(의 관심)을 보기 때문이다. 이론만 파던 사람은 책에서 읽은 이론을 영화에서 찾으려 하고, 메가폰만 잡아온 사람은 현장의 설정이 눈에 먼저 들어오고, 배우 매니저에게는 자기 배우의 연기가 가장 먼저 보이고, 돈을 투자한 제작자에게는 흥행 가능성이 제일 먼저 보인다. 이 모든 것이 영화다. 그래서, 이 영화 최고요 하면서 남 보라고 목줄 끌고 극장으로 데려올 수도 없고, 이 영화 별로요라고 혼자 생각할 수는 있어도 남들에게 보지 말라고 광고하고 다닐 수도 없는 것이다. 비평가도 마찬가지이다. 비평가들도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위주로 본다. 보드웰과 톰슨이라는 영화학자의 다음과 같은 솔직한 이야기가 참고가 될 듯하다: Because an analysis is limited by his or her purpose, there is little chance of "getting everything," of accounting for each facet of a film. As a result, these analyes do not exhaust the films. ... Indeed, whole books can be and have been written about single films without exhausting the possibilities for enriching our experience of those films. (영화에 대한 분석은 비평가의 목적에 따라 제한되기 때문에, 영화를 설명하는 비평에서 그 영화의 모든 면이 파악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 결과, 이러한 분석들은 영화 전체를 설명하지 않는다. ... 실제로,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풍부한 가능성을 모두 검토해보지도 않더라도, 한 영화에 대해 한 권짜리 책들이 쓰여질 수 있고 쓰여 오고 있는 것이다.) 자, 내가 드리는 말씀이 "신문선은 공 잘차서 해설하냐?" 하는 주제의 이야기는 아님은 잘 아실 것이다. 충무로 출신만 영화 만들고 영화 비평할 수 있냐 마냐 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이미 그런 세상도 아니다. 그보다는, 유홍준이 되살린 명언처럼,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는 쪽에 가깝다. 사랑하면 알게 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알면 보이는 것은 분명하다. 왜 문화유산 뿐이랴. 점잖지 못한 세 줄 정리: 영화는 졸라 종합예술. 비평가든 관객이든 지조때로 일부분만 본다. 나 보는 것 안(못)본다고 남 씹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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