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가해 차량 by deulpul

한국에서 운전 면허를 받고 실제 도로 주행을 배울 무렵, 복잡한 도심 차량 물결 속에서 초짜 운전사가 제대로 버틸 수 있을까 걱정하던 나에게 한 선배는 다음과 같이 조언해 주었다. 저- 앞에 가는 차들 좀 봐. 별별 운전사 다 있잖아? 나이, 성별, 직업, 학력, 체력, 성격, 이 모든 것이 천차만별인 사람들이 모두 능숙하게 운전하고 있지 않냐구. 그런 거 보면, 자동차 운전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기초 기능 같은 것인지도 몰라. 걱정 말라구. 당신도 금방 익숙해질 테니까.

이 말은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운전을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되지만, 지레 겁 먹고 주눅이 들 필요는 없는 것이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기초 기능 같은 것인데.

며칠 전, 편도 일차선인 T자형 작은 삼거리다. 샛길에서 나와 우회전을 해서 본 도로에 합류하려던 나와 내 앞의 차는 잠깐 멈춰 섰다. 왼쪽 멀찍한 데서 차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 잠시 기다렸더니 비실비실 접근하던 차가 교차로에 와서 우리가 나오던 길로 싹 우회전을 한다. 이 차가 직진하는 줄 알고 기다리고 섰던 내 앞의 차는 화를 벌컥 낸다. 차 안으로부터 Moron! @#$%^!! 하는 욕설이 튀어나오고, 부아앙- 하는 급가속 소리가 났다. 신호를 주지 않은 상대차 때문에 앞 차의 운전사는 순간적으로 빡 돌아버린 것이다.

이 교차로 상황에서 앞 차의 운전사가 다가오는 차를 위해 기다려 준 것은 일종의 배려다. 자기가 먼저 우회전을 할 수는 있지만, 다가오는 직진 차에게 영향을 준다. 그 차는 속도를 줄여야 하거나, 적어도 신경을 써야 한다. 앞 차의 운전사는 이런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 다가오던 차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그런데, 그 차는 아무런 신호를 주지 않고 다가오다가 우회전 해 버린다. 상대 차의 무지나 무시나 무신경 때문에 배려가 쓸데없는 일이 되어 버렸으니 신경질을 낼 만도 하다.

도로에서 보면 유달리 깜빡이 신호를 아끼는 사람이 있다.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 움직이면 되는 일인데, 그러한 노동이 수고로워서인지 전구가 아까워서인지 깜빡이 신호에 영 인색한 사람들이다. 사람 사이든 차량 사이든 커뮤니케이션은 언제나 중요하지 않은가.

여럿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상대에 대한 배려가 소중한 것처럼, 여러 차들이 어울려 다니는 공로(公路)에서 상대 차에 대한 기초적인 배려 역시 똑같이 소중하지 않을까. 굳이 법규로 강제하지 않더라도, 조금만 신경을 쓰면 자신과 남이 훨씬 더 명랑하게 살아갈 수 있다. 이런 거 신경 안쓰는 족속이 있어서 삶이 불필요하게 피곤하다.

여기에는 상대에 대한 배려 같은 도덕 교과서틱한 이야기보다 좀더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이런 무신경 족속은 다른 운전자를 자극함으로써 사고 발생 가능성을 높인다는 것이다. 사람 미치게 만드는 차들 때문에 꼭지 한번 돌아 보지 않은 운전자가 있을까.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도 예전에는 무조건 머리를 들이미는 버스를 죽어라 따라가 앞에서 급정거함으로써 정지시킨 적도 있고, 덩치로 밀며 헤집고 다니는 덤프 운전사와 차 머리를 맞대며 다투어 본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일이다. 참 객기 하나로 험하게 살았다.

내가 가입해 있는 자동차 보험회사에서 보내오는 소식지는, 이렇게 다른 운전자를 순간적으로 빡 돌게 만들 수 있는 운전 행위로 다음과 같은 것을 꼽았다.

- 휴대 전화로 수다 떠는 운전자
- 바짝 붙어 따라오는 운전자
- 깜빡이 안 켜는 운전자
- 끼어드는 운전자
- 안 끼워주는 운전자
- 왼쪽 추월 차선으로만 달리는 운전자

정말, 앞에서 쎌폰으로 수다 떨면서 깐죽깐죽 운전하는 분 만나면 콱 액셀 밟아서 추월하고 싶어질 듯하다. 거꾸로, 리어 뷰 미러를 꽉 채우며 몇 뼘 뒤에서 쫓아오는 차를 보면 브레이크를 콱 밟고 싶은 충동이 든다. 나는 특히 뒤에서 바짝 붙어 오는 넘을 크게 신경쓰는 편인데, 안전 때문이라기보다 공격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사람 사이에 적당한 거리가 유지되어야 편하게 느끼는 것이 본능인데, 그 연장인지도 모른다. 깜빡이 안 켜는 넘들은 위에서 이야기했고.

끼어드는 운전자나 안 끼워주는 운전자나 서로 피장파장인 것 같지만, 이건 상황에 따라 다르게 봐야 할 듯하다. 인구 천만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는 작은 도시에 살아서 그런지, 비교적 끼어들기가 많지 않은 편인데 가끔 기막힌 상황을 만난다. 예컨대 공사로 차선이 합쳐지는 지점에서, 다른 차들은 길게 늘어서서 정직하게 합류하고 있는데 갓길로 냅다 쫓아와서 앞으로 기어드는 넘들이 아주 간혹 있다. 한대 패주고 싶은 넘들이다.

옛날 같으면 죽어도 안 넣어 주지만, 요즘은 그래 자네 뭐 바쁜 모양일세 하고 모르는 체 넣어준다. 그런데, 이렇게 넣어주면 뭔가 불법을 용인하고 공범이 된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이 잠깐 든다. 내 뒷차에게도 이유없이 미안하다. 이래저래 짜증나는 넘들이다.

하나씩 번갈아가며 들어가는 지점에서 죽어도 끼워주지 않고 앞차를 물고 가는 넘들도 있다. 도대체 심리 구조를 이해할 수 없는 넘들이다. 산술 능력이 부족하다고나 할까. 차 한 대, 2-3미터만큼 빨리 가봐야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일반적으로 추월 차선으로 인식되는 왼쪽 차선에서 뒷줄을 길게 달고 세월아네월아 굴러가는 차도 있다. 오른쪽 차선이 비었는데도 말이다. 예전에도 신문에서 이런 차량에 대한 불만의 글을 본 적이 있는데, 길에서의 에티켓을 지니지 못한,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개념 상실한 차량이라 하겠다.

이런 종류의 차량이 주변에서 집적대면 누구나 심기가 불편해지는 모양이다. 이게 사고 가능성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게 저 보험 소식지의 분석이다. 사실 이렇게 지적된 사항들은 모두 단순한 배려의 문제가 아니다. 명시적이거나 관습적인 규율을 어기는 위반 행위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도로 위에서 벌어지는 운전자 간의 상호작용 측면에서도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모양이다. 심리적 가해자라고나 할까.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운전이지만, 누구나 바르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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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isanghee 2007/10/05 13:01 # 삭제 답글

    저도 반성해야겠습니다.
    제 운전신조가 "내 앞에 다른 차가 있으면 안돼!"라...^^
  • 시노조스 2007/10/05 13:49 # 답글

    깜빡이 때문에 오토바이 타고 가다가 죽을뻔한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화가 나지요.

    그러고보니 앞에서 비틀거리면서 천천히 가길래( 그래도 60km 이상 ) 뭔가 싶어서 추월하며 봤더니 헨들에 책을 같이 붙잡고 보면서 가더군요. 오오 놀라워라 -_-
    요즘은 DMB를 보면서 달리는게 인기라는군요. (?)
  • Charlie 2007/10/05 14:51 # 답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찔리는게 너무 많군요. ;ㅁ;
  • LaJune 2007/10/05 15:20 # 답글

    '바짝 붙는다' 부분에서 옛날 공중전화 걸 때가 생각나네요. 삐삐만 있던 시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데 뭐하는 여잔지(2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정말로 제 등에 찰싹 달라붙어 있더라고요. 전화 통화 시작한지 5초도 안 되었는데 알아서 뒤로 가겠거니 했더니 더욱 달라붙는 여자. 왜 이리 달라붙느냐고 화를 버럭 내도 소용이 없고 이건 뭐 개념없음이랄까. 한사코 달라붙어서 어쩌자는 건지. 중요한 통화였는데다가 여분의 동전이 없어서 이미 넣은분량만큼 통화는 해야했고......... 지금 와선 레즈비언이었던가 생각해봅니다.
  • Yoon 2007/10/05 22:21 # 답글

    도로연수받을때 강사분한테 물어봤죠.. 깜빡이는 언제 켜나요? 켜고 싶을때 키면 됩니다.. 늦게 켜는건 문제지만, 빨리 켜는건 문제가 아니죠.. 그러셨던..
    깜빡이 열심히 켜고, 들어오는 차들 열심히 양보해주면서.. 왼쪽 비우고 달립니다.. ^^
  • intherye 2007/10/06 00:31 # 답글

    요즘 택시엔 듀얼스크린이 자주 눈에 띄더군요. 한 쪽에선 내비게이션 한 쪽에선 동영상이..
    기사도 두 명쯤 더 필요할 듯합니다. -ㅛ-
  • deulpul 2007/10/06 02:59 # 답글

    생각해 보니 다른 운전자가 나를 보고 빡 돌아버리는 상황도 분명 있긴 있었을 게다. 음... 나름 제대로 한다고 하긴 하는데, 미국 넘 80%인가가 자신이 '평균 이상'으로 운전을 잘 한다고 믿고 있다는 조사도 있고. 저도 반성합니다. mea culpa 시리즈 중 하나가 될 듯...

    isanghee: NASCAR로 가셔야 할 피를 타고 나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하-. 레이싱 걸 보면 막 끌리신다든가... 그건 다 그런가.

    시노조스: 헙... 책을 읽으면서요?? ... 혼을 홀랑 빼놓는 추리 소설 종류가 아니었길 바랍니다. The Complete Idiot's Guide to Driving Etiquette 같은 책이었을지도... 예전에 시청자 투고 비디오 프로그램인 AFV에서 나온 건데, 고속도로 달리며서 색소폰 연습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게 소리가 커서 집에서는 연습하기 힘들다 해도, 혹은 장거리 운전이 아무리 지루하다 해도 건 너무하죠? 그렇지만 저도 해보고 싶은 충동이 들더군요... 음... 게다가 말씀대로 DMB 등등 주의를 흩뜨러뜨리는 장난감들이 점점 많아져서요. 아무래도 멀티태스킹 권하는 사회인 모양입니다. 하지만 역시 도로에서는 오디오 버튼 조작 하나로도 사고가 날 수 있다는 경고가 정답이겠죠?

    Charlie: 바늘로 콕콕, 하하. 저랑 같이 참회하고 회개하시죠. 그런데 이게 습관이라서...

    LaJune: 난처하고도 신기한 경험을 하셨군요. 그 공중전화 어디죠? 하하-. 다음과 같은 추정을 할 수 있겠습니다. 1) LaJune님이 하시던 통화 내용이 정말정말 재미있었다. 2) 날이 무척 추웠다. 3) LaJune님이 정말 예쁘다. 음... 생각해보니 밀착녀가 남성 스타일을 찾고 있었던 건지도... 털썩. 그나저나 밀착남이 아니어서 천만다행입니다. 사람이 편하게 느끼는 거리 문제에 대해서는 조만간 좀 훑어보겠습니다.

    Yoon: 오, 감사드려요. 왜 감사를? 내가 Yoon님 차 옆에서 운전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 안되나... 여하튼 강사님 말씀이 정답이네요. 하지만 늦게 끄는 것은 문제가 되죠, 하하-. 깜빡이 켜고 20여 분 직진해 달리는 차도 봤습니다. 너무 일찍 켠 걸까? 저 글 쓸 때 다른 선배 한 사람도 생각났는데, Yoon님과 비슷하게 도로 위에서 도 닦는 사람이었습니다. 들어오는 거 다 넣어주고 밀면 밀려주고 당기면 끌려주고. 그래도 어디 갈 데 못 가는 거 못 봤고, 남보다 늦게 다니는 것도 못 봤습니다. 더구나 초보 운전자가 아니라 햇수로 보면 베테랑급 운전사였죠. 옆에서 보면서, 운전이란 정말 자기 수양하기 딱 좋은 아이템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intherye: 그야말로 ㄷㄷㄷ... 차 안에 있는 비디오 기기는 차 시동이 걸려 있을 때는 작동되지 않게 하면 너무 심하겠죠? 그래봤자 용산이나 장안평 한번 갔다 오면 뚝딱 고칠 수 있을 거고... 역시 21세기형 인간은 멀티태스킹에 익숙해져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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