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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숙제를 하는 데 인용하시겠다는 어떤 분의 덧글을 보고 여러 가지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먼저, 숙제에 쓰실 만큼 쓸모가 있다고 생각해 주셔서 고마웠다. 남도 볼 수 있는 형태로 글을 쓰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일은, 남이 그 글이 쓸모 있다고 생각해 주는 것일 게다. 쓸모의 용처는 중요하지 않다. 학술 논문처럼 인용되는 형태로 쓸모가 있어도 좋고, 한번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는 형태로 쓸모가 있어도 좋고, 그냥 술자리의 농담 소재가 되는 정도의 쓸모가 있어도 좋다. 쓸모 있다는 평가는 글 쓰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정신적 보상이 아닐까.
두 번째로, 인용하시겠다고 알려 주셔서 고마웠다. 인터넷에 쌓인 자료를 조사하기도 바쁘실텐데 일껏 덧글을 남겨 주신 것이다. 그냥 보고 가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고, 다녀간 것조차 알 수 없는 것이 넷 문서의 속성인데, 일부러 글을 남긴 것을 보고, 나는 이 분이 원래 선한 분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좋은 매너를 가지신 분임은 틀림없어 보였다. 여기까지도 참 고맙지만, 만일 이 분이 숙제 레포트에 인용의 출처를 밝혀 주신다면 한 가지 고마움이 더할 것이었다. 이것은 내가 알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나와 직접 관련이 있는 일도 아니니, 사실 내가 고마울 일은 없다. 만일 출처를 잘 밝혀 쓰신다면, 인용하신 분이 자기 자신에게 먼저 감사해야 할 듯하고, 해당 숙제를 내 준 교수(선생)님도 인용하신 분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예전에 감명 깊게 본 글 중 한 대목부터 소개한다. 변호사이기도 한 김두식 한동대 교수가 몇 년 전, 2005년 대학의 풍경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 중 일부다. 학생들이 제출한 보고서 중에서 보석 같은 작품이 눈에 띌 때마다 나는 고민에 빠진다. 그냥 좋은 점수를 주고 말 것인가, 인터넷을 검색하여 똑같은 보석을 찾아낼 것인가. 불행히도 몇 개의 열쇳말 검색으로 그 탁월한 보고서의 바닥이 드러날 때가 적지 않다. 가끔은 두 학생이 우연히 똑같은 자료를 ‘참조’하여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두 개의 서평을 제출하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 의심과 추궁 전문의 법조계를 떠나 대학으로 왔건만, 5년의 선생 노릇 끝에 ‘스승’보다는 ‘수사관’ 쪽에 가까워진 서글픈 자화상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아마 우리의 현주소일 것이다. 김교수도 지적하지만, 이 상황은 취직을 위한 영어 공부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해 진지한 학문 탐구를 모두 포기하거나 방기해야 하는 우리 대학의 현실과, 접속만 하면 잘 재단된 정보가 넘쳐 나는 인터넷이 맞물려 벌어지는 일일 것이다. 어떤 것이 먼저인지, 혹은 어떤 것이 더 큰 요인인지 모르겠지만 불행한 상황임은 틀림없다. 대학의 지적 풍토가 값싼 기성복 수준으로 떨어진다는 점 말고도, 본격적인 지적 생활의 첫걸음을 내딛는 대학생을 잠재적 표절 혐의자들로 내몰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크게 바뀌지 않는 한, 나도 언젠가는 김교수와 같은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솔직히 학생들이 인터넷으로 과제에 필요한 정보를 찾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완벽한 방법은 없다. 또 바람직하지도 않다. 정보를 찾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문헌 검색'에 해당하며, 인터넷이라고 해서 이 지적 검토 과정을 폄하해야 할 이유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문제는 찾은 문헌과 정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막아야 할 것은 인터넷 검색이 아니라 검색 결과로 나온 것을 제대로 인용하지 않는 관행이다. 내가 미국에 와서 겪은 첫 학기는 여러 모로 나에게 큰 행운이었다. 그 중 하나는 브라운이라는 여교수가 진행하는 학부 4학년 수업을 들었던 것이다. 이 수업은 여러 모로 인상적이었는데, 앞으로 평생 생각하고 간직하며 살아야 할 원칙들을 배운 수업이기도 하다. 수업은 몇 명으로 팀을 짜서 한 학기 내내 프로젝트를 만드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매주 과제가 나왔는데, 팀 과제도 있었고 개인 과제도 있었다. 이러한 수업 커리큘럼을 설명하던 첫 시간에, 브라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 앞으로 내가 내 준 숙제를 하려면 여러분 혼자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책도 찾아보고 신문이나 잡지도 보고 컴퓨터도 보고 친구들과 토론도 해야 한다. 어떤 과제는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봐야 하는 것도 있고 음악을 들어야 하는 것도 있다. 앞으로 숙제를 하면서 이런 일이 생기면, 그 출처를 과제에 모조리 밝혀라. 책, 신문, 잡지, 인터넷은 물론이고, 친구와의 토론, 텔레비전 시청, 들은 음악 같은 것도 하나도 남김 없이 깡그리 밝혀라. 예컨대, 기숙사 룸메이트와 잡담을 나누는 동안 상대방의 말에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이를 과제에 썼으면 "몇월 며칠 어디어디서 한 잡담에서 룸메이트 아무개"라고 밝혀라. 텔레비전을 보다 얻은 아이디어를 과제에 썼으면 "몇월 며칠 무슨무슨 방송 무슨무슨 프로그램"이라고 밝혀라. 팀원들끼리 토론한 것도 팀 과제가 아니라 개인 과제에 쓸 때는 팀원 토론에서 나온 것이라고 밝혀라. 과제에 쓰인 내용 중에서 본인의 생각이 아닌 것은 티끌만한 것이라도 모조리 출처를 밝히는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좋은 생각을 해낼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지만, 또한 이 세상의 모든 좋은 생각이 여러분 머리에서 나올 수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이것은, 말하자면 인용의 원리주의자 같은 태도라 할 만하지만, 인용이 왜 필요하고 출처를 어떻게 밝혀야 하는지를 집약적으로 설명해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원칙에 따라 숙제를 하다 보니, 어떤 경우에는 과제 전체가 남 글의 인용으로 구성되어 있고 내 생각이란 이두 문자처럼 토씨나 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 한심한 때도 있었고, 본문 보다 미주(end note)가 더 길었던 때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브라운 교수가 나무라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고, 성적도 괜찮게 받았으며, 수업에서 쓴 페이퍼로 학회 발표까지 갔다. 너무나 뻔하지 않은가. 세상에 좋은 아이디어를 모두 내가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김두식 교수 말로 하자면, "보석 같은 작품"일수록 해당 학생의 작품이 아닐 가능성이 더 커지는 것이다. 이것은 교수님 같은 전문가가 보면 금방 알게 마련이다. 괜히 그 과목 가르치고 월급 받고 살겠나. 출처를 명확하게 표시하지 않은 인용으로 쓴 멋드러진 레포트와 자기 생각은 많지 않고 인용으로 가득 찬 레포트가 있다고 치자. 전자가 지적 범죄 행위라는 점은 접어두고라도, 나는 후자에게 점수를 더 주겠다. 후자의 레포트는 지적 작업을 하는 데 필요한 건강성이 드러나 있으며, 더구나 관련 문헌과 정보를 폭넓게 훑었다는 증명도 된다. 모두 아시겠지만, 해당 주제와 관련한 다양한 자료를 찾아 인용하는 것은 기막힌 문헌 하나를 찾아 긁어오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 글의 미려함을 보는 문학 수업이 아닌 한, 멋진 레포트보다는 넓은 레포트가 더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나는 이처럼 각주나 미주로 꽉 찬 양심적 과제에 더 높은 점수를 줄 것이며, 이는 김두식 교수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상적으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런 인용에다 자신의 생각을 더 붙이면 금상 첨화이며, 바로 이것이 literature review에서 research question과 method를 거쳐 findings와 discussion으로 나가는 한 판의 지적 작업의 뼈대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레포트 같은 과제에 출처를 밝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란다. 인터넷에 있는 정보를 달랑 써먹었다는 부담감이 들 수도 있지만,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부담감이 들든말든, 출처를 밝히든말든, '전문가'가 보면 다 알게 마련이다. 어차피 알 것, 내가 이렇게 꼼꼼하고도 폭넓게 조사했슈 하고 분명히 명시하자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누차 말하지만 이렇게 조사를 하고 인용을 하는 과정 자체가 배움의 과정이다. 혹시 이렇게 출처를 꼼꼼히 밝혔더니 오히려 성적이 안나온 경우가 있다면 제게 알려주시기 바란다. 수업 거부 운동이라도 벌여 드리겠다. 그리고 현재 학생들과 생활하시거나 앞으로 그러실 분들은 과제물의 출처 명시 방식을 학생들에게 정확히 공지해 두시는 게 좋겠다. 인용은 자유로이 하되 모든 출처를 각주나 미주로 정확히 밝히라는 식으로 말이다. 학생들이 인터넷 정보를 과제에 활용하는 일은 앞으로 더욱 빈번해질 것이며, 이를 물리적으로 막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를 정당한 영역 안으로 끌어들여 '양성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지적 정보를 제대로 활용하도록 유도하고 그 위에서 학생 본인의 아이디어를 꽃피우도록 이끄는 것은 선생의 의무이자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update] 웹 인용 주석 표기 사례: deulpul, "그 출처를 과제에 모조리 밝혀라", 웹사이트 http://deulpul.egloos.com/1649825 (2007년 10월13일 접속). 이경호, "엔니오 모리꼬네, 'PIFF에 불쾌해' !", <마이데일리> 웹사이트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S2D&office_id=117&article_id=0000111225§ion_id=106§ion_id2=222&menu_id=106 (2009년 2월30일 접속). 마일드, "운수 좋은 날", <디시인사이드> 웹사이트 http://gall.dcinside.com/list.php?id=hit&no=5035 (2010년 4월1일 접속). enigma8, "Cirque du Soleil KA", <유튜브> 웹사이트 http://video.google.com/videoplay?docid=-3684598573915955389&q=Cirque+Du+Soleil&total=2915&start=0&num=10&so=0&type=search&plindex=1 (B.C. 240년 음력 8월15일 접속). (혹시 한국에서 학제간에 널리 쓰이는 웹 사이트 인용 주석 표기법이 있으면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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