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분이 착하기까지 by deulpul

예쁘면 얼굴값을 한다는 말이 있다. 좀더 흔한 말로 하자면, 예쁘면 꼴값을 한다 정도가 되겠다. 성에 대한 편견이 담긴 진술이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남녀 모두 마찬가지다. 잘 생긴 넘들도 꼴값을 한다.

그런데, 잘 생기고 예쁜 사람들에 대한 질시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르는 이 주장이 현실에서 항상 맞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맞을 때도 있다는 뜻이다.) 현실에서는 잘 생기고 성격 좋은 사람도 많고, 안 생긴데다 성질까지 더러운 사람도 많다. 즉, 외모와 성격 간에 과학적인 연관 관계를 입증하기는 어렵다. 물론 우리에게는 예쁘고 잘 생긴 것들은 죄다 성질이 나쁜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루종일 눈이 왔다. 펑펑 쏟아지는 눈이 아니라 싸락싸락 오는 눈, 건조하고 습기 없는 이다. 온종일 눈보라 경보가 내려졌다. 센 북서풍에 실려 오는 눈 알갱이들은, 맞으면 아팠다. 창에 부딪치는 눈 알갱이 소리가, 마치 모래를 퍼다 끼얹는 것 같았다.

습기 없는 눈일지언정, 많이 오니 쌓인다. 눈은 정강이까지 올라왔으며, 세상은 한산하다. 눈이 한창 올 때는 길을 제대로 치우지 않는데, 치워봐야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토요일이라서 더 그랬나보다. 볼 일을 보러 차를 타고 길을 나섰다가 돌아오는데, 주변에 버려두고 간 차가 여럿 있었다. 이를테면 차가 서 있어서는 안될 곳에 주차해 있고, 주변에는 발자국이 어지러이 찍혀 있는, 그런 차들이었다.

쯧쯧하며 지나칠 때는 나 역시 곧 그런 신세가 될 줄 몰랐다. 큰 길에서 벗어나 내가 사는 아파트로 들어오는 길은 매우 약한 오르막길 경사다. 1도나 될까. 평소에는 오르막길인지도 모르면서 다니는 곳이다. 이 곳을 오르는데, 바퀴가 헛돈다. 후진했다가도 출발해 보고, 방향을 바꿔서도 해보고, 이런저런 시도를 해 봐도, 될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아파트 진입로 한가운데여서, 차를 그냥 놔 두고 갈 수도 없다.

눈보라 속에서 망연자실하며 차를 둘러보고 있는데, 갑자기 복음이 들려왔다. "Can I help you?" 어디서 홀연히 등장한 천사 하나가, 얼어서 빨간 얼굴에 함박웃음을 띄우며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키가 자그마한 한 여자분이 나타나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인적 드문 눈세상에서, 바람 뚫고 눈 헤치며 제 갈 길 가기도 쉽지 않을 텐데, 구태여 달려와 차 뒤를 밀어주겠다고 한다.

정말 괜찮은지, 정말 힘 쓰겠다는 것인지 재차 확인하며 얼굴을 들여다보니 화사하고 해맑기가 이를 데 없다. 미스 유에스에이 선발대회에 나선 여성들 중 하나를 골라, 키를 4분의 1쯤 잘라내고 털오바를 입히고 털목도리로 둘둘 감아 눈밭에 두 시간쯤 내놓으면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열심히 먹고 열심히 운동하는 미국 여성들은, 겉으로 보기는 가냘프고 호리호리해도 속으로 인크레더블 헐크와 같은 힘을 감추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저는 차에 앉아서 여성에게 뒤를 밀어달라는 것은 한심한 노릇 같아서, 운전해 보겠냐고 했더니 그냥 너가 하란다. 그래서, 자기 가방을 눈 위에 던진 그녀는 뒤에서 차를 밀고 나는 차 안에서 살살 액셀을 밟았다. 혼자 끙끙 용을 써도 움직이지 않던 차는, 인크레더블하게도 앞으로 조금씩 움직이더니 곧 구덩이를 빠져나와 평평한 곳으로 잘 굴러갔다. 그녀는 천사이거나, 아니면 인크레더블 헐크인 것이 틀림없었다.

차에서 내려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했더니 걱정 말라며 주말 잘 보내라는 인사까지 하고 눈보라 속으로 사라진다. 얼마나 멀리 가야 하시는 분인가 걱정이 되어서 아파트를 물어보긴 했는데, 경황이 없어서 동, 호수까지 물어보지는 못했...

사실 그가 한 일은 별 것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지나가다 끙끙대는 사람을 보고 힘 한 번 써준 것이 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천사와 같았다. 대개 도움이나 배려라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주는 쪽에서는 작은 노력이지만 받는 쪽에서는 큰 힘이 되는.

선의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머리에서? 심장에서? 모르긴 모르지만, 예쁘거나 잘 생긴 얼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은 분명한 것 같다. 눈 속의 그녀도 실제로 예쁜 게 아니라, 착해서 그렇게 예뻐 보였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글의 제목은 "착하면 예뻐요"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제가 조금 도와드릴까요?" 라는 말과 함께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미는 일은 스스로를 예쁘고 잘 생기게 만드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아닐까.

추가하자면, 얼굴에 웃음을 띠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런 일이 드문 곳에서 무뚝뚝한 얼굴로 저 말을 하면 "웬 간섭이슈?" 할 수도 있고 "그 사람 오지랖도 넓네" 할 수도 있고 "뭐 팔려구?" 할 수도 있고, 혹은 동정 받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특히 딱하고 한심하다는 표정은 절대 안된다. 이런 표정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면, 받고 나서도 찜찜하고 불편하다. '내가 아니어도 당신은 잘 해낼 수 있겠지만, 조금 도움을 받으면 훨씬 편하실 겁니다'라는 마음으로, 편안하게 웃는 표정을 짓는 것이 핵심이다.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 착한 사람이라면 예쁘지 않을 도리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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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kirrie 2007/12/03 10:02 # 삭제 답글

    눈 위에서 차를 민다는게 쉽지 않을텐데, 아닌게 아니라 그 분 정말 속으로 '인크레디블 헐크'가 아니었을까요? ㅎㅎ
  • A-Typical 2007/12/03 10:58 # 답글

    미국 여성이 겉으로 보기에 가냘프고 호리호리한 경우는 적으나, 인크레더블 헐크와 같은 힘을 감추고 있는 경우는 적지 않지요. ^^

    누군가의 호의를 받으면 나도 호의를 베풀고 싶어지니 예뻐지는, 잘생겨지는 방법은 전염성이 있나봅니다.
  • 섬백 2007/12/03 11:39 # 답글

    예쁜 분이 착하기까지 하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 deulpul 2007/12/03 19:57 # 답글

    kirrie: 경사가 그다지 심하지 않았으니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눈 위에서 뭘 밀자면 힘보다는 발이 미끄러지지 않아야 하는데, 그러고 보면 그 분은 인크레디블 마당발이었는지도 몰라요….

    A-Typical: 사실 그래서 좀 어색한 경우도 많죠. 언젠가 미국 아줌마와 큼직한 삼발이를 들고 너댓 블럭 움직일 일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제가 어깨에 메긴 했습니다만, 그 아줌마가 저보다 덩치도 더 크고 힘도 훨씬 좋았을 것이 틀림없었던….

    섬백: 혹은 설상가상… 어쩌라구… 하하-. 그런데, 예쁜 분보다 착한 분이 점점 더 좋아지는 것은 종심소욕이불유구가 되어 가는 탓이겠죠? 종심소욕이불구가 되어 가서 그런가….
  • isanghee 2007/12/05 01:17 # 삭제 답글

    가끔 애 서넛 데리고 월마트 같은 곳을 종횡무진하는 여인들을 보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 deulpul 2007/12/05 06:26 # 답글

    엄마도 튼튼한데 애들은 왜 또 그리 작은지, 가뜩이나 힘 좋은 엄마가 휘떡휘떡 들고 돌리는 것 보면 저절로 입이 벌어지죠, 하하-.
  • gostopgo90 2008/04/09 18:58 # 삭제 답글

    "예쁘고 착한" 것이 아니라 "착하니까 예쁜" 것처럼 제 마인드도 변하는 것 같아요
    (예쁘니까 착한 - 이건 아니잖아 ㅎㅎ)

    눈이 즐거우면 즐거운 만큼 쉽게 잊혀지겠지만 마음이 즐겨웠다면 오래가겠죠!
    결국 마음이 예쁜 그런 여자를 ^^*
  • deulpul 2008/04/10 05:58 # 답글

    그게 상식이겠죠? 보기엔 외모가 예쁜 게 좋을지 몰라도, 함께 지내기에는 마음이 예쁜 사람이 최고인 듯 싶습니다. 그런데 세태를 보면 "예쁘니까 착하다!"는 억지가 점점 상식이 되어 가는 듯…. 하다 못해 표현도 얼굴이 착하고 몸매가 착하다니…. 몸매가 무슨 자원봉사를 했남, 선행을 했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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