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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1월 20일
출퇴근과 같은 바쁜 상황이 아니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지하철을 탈 때면 되도록 사람이 적은 편을 타려고 했다. 환승 때 사람이 몰리면 차 두어 편은 그냥 보내곤 했고, 조금 멀리 돌아가는 노선이라도 사람이 적은 걸 탔다. 바쁜 일상이 아니라 여행이라고 생각했으므로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그런 여유 속에서 관찰한 지하철 세상은 재미있었다.
열차가 그리 번잡하지 않은 구간을 지날 때, 예컨대 4호선 숙대입구역쯤이라든가 7호선 태릉역쯤에서 꼭 만난 아저씨들이 있다. 바퀴 달린 가방 위에 커다란 붐박스를 얹고 객차에 올라온 이 아저씨들은 '통키타 CD'를 파는 분들이다. 차에 들어서자마자 이들은 갑자기 노래를 튼다. 덜컹덜컹 소리 말고는 조용한 지하철 안이 돌연 김정호로 가득찬다. 강요되는 음악, 이런 거 나도 싫어한다. 뽕짝 메들리가 높은 볼룸으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버스 스피커, 이런 거 나도 싫어한다. 그러나 요즘은 듣기도 어려운 김정호가 아닌가. 아마 판매 매뉴얼에 추천되어 있는 곡인지, 아저씨들은 꼭 이 노래를 틀었다. 김정호의 '하얀 나비'. 나는 내가 듣던 mp3를 살며시 끄고, 여전히 무관심한 듯, 출입문 위의 지하철 노선표를 열심히 연구하는 척 하며, 이 노래와 아저씨들의 멘트를 모두 들었다. 아, 조용한 지하철 안에서 듣는 김정호는 참 매력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지하철을 타시면 자주 뭔가를 사오신다. 아니, 사오셨다. 식구들은 아버지가 왜 지하철에서 물건을 사오시는지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내놓곤 했다. 아버지가 만일 김정호를 들으셨다면 저 CD를 사오셨을까. 지금, 아버지처럼 한 장 사 오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최근 우연한 계기로 옛날, 지금은 흘러간 가요쯤 되버린 노고지리의 '찻잔'을 되새김질하고 있다. youtube.com 에서 찾아서 듣고 있었는데, 원곡은 없고 비교적 최근에 라이브 한 것을 녹화한 것이라, 직직거리는 모노 음질이나 힘이 좀 떨어진 가수의 음색이 원곡의 맛을 찾기엔 역부족이었다. 얼마 전, 가까운 곳에 계시는 신부님 집에서 41도짜리 일본 소주를 홀짝이며 이 노래를 청해 들었다. 음악 전문가이기도 한 이 신부님의 콜렉션 중에는 아니나 다를까, 이 흘러간 가요가 들어 있었다. 작은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찻잔은 소주잔과도 기막히게 공명했다. 며칠 뒤, 이 곡을 달라고 떼를 써봤다. 글쎄, 김정호나 이 곡이나, 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샀을 것이다. 신부님은 다음과 같은 짤막한 글과 함께 찻잔을 보내주셨다. 이 곡은 희대의 명곡이란 생각이 들어요. 한국말 고유의 구어체를 살린, 입에 착착 감기는 가사, 일종의 minimalism에 가까운 편곡, 괜찮은 녹음 등등. 참 희한하죠. 이런 노래 하나를 통해서 그 시대 '전체'의 감성과 결을 느낄 수 있으니. 그래서 딴따라들..예술가들은 위대한 사람들이란 생각을 해요. (무단 전재 죄송) 자못 노래란 바로 이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거듭 생각한다. 나는 음악에 관한 한 대충 잡식성이며 시끄럽고 신나는 노래도 좋아하지만, 이렇게 추운 겨울밤에 오두마니 앉아서 들을 수 있는 노래란 김정호나 노고지리 같은 쪽 말고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 리듬은 마음을 아프게 만들고 그 가사는 '니가 날 떠났어 난 슬펐어'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영감과 위안을 준다. 공명. 내가 울릴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내가 울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면 지하철의 김정호나 노고지리도 한갓 소음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면 어떤 불행도 슬프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