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 갈색 탁자에 다소곳이 by deulpul

출퇴근과 같은 바쁜 상황이 아니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지하철을 탈 때면 되도록 사람이 적은 편을 타려고 했다. 환승 때 사람이 몰리면 차 두어 편은 그냥 보내곤 했고, 조금 멀리 돌아가는 노선이라도 사람이 적은 걸 탔다. 바쁜 일상이 아니라 여행이라고 생각했으므로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그런 여유 속에서 관찰한 지하철 세상은 재미있었다.

열차가 그리 번잡하지 않은 구간을 지날 때, 예컨대 4호선 숙대입구역쯤이라든가 7호선 태릉역쯤에서 꼭 만난 아저씨들이 있다. 바퀴 달린 가방 위에 커다란 붐박스를 얹고 객차에 올라온 이 아저씨들은 '통키타 CD'를 파는 분들이다. 차에 들어서자마자 이들은 갑자기 노래를 튼다. 덜컹덜컹 소리 말고는 조용한 지하철 안이 돌연 김정호로 가득찬다.

강요되는 음악, 이런 거 나도 싫어한다. 뽕짝 메들리가 높은 볼룸으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버스 스피커, 이런 거 나도 싫어한다. 그러나 요즘은 듣기도 어려운 김정호가 아닌가.

아마 판매 매뉴얼에 추천되어 있는 곡인지, 아저씨들은 꼭 이 노래를 틀었다. 김정호의 '하얀 나비'. 나는 내가 듣던 mp3를 살며시 끄고, 여전히 무관심한 듯, 출입문 위의 지하철 노선표를 열심히 연구하는 척 하며, 이 노래와 아저씨들의 멘트를 모두 들었다. 아, 조용한 지하철 안에서 듣는 김정호는 참 매력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지하철을 타시면 자주 뭔가를 사오신다. 아니, 사오셨다. 식구들은 아버지가 왜 지하철에서 물건을 사오시는지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내놓곤 했다. 아버지가 만일 김정호를 들으셨다면 저 CD를 사오셨을까. 지금, 아버지처럼 한 장 사 오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최근 우연한 계기로 옛날, 지금은 흘러간 가요쯤 되버린 노고지리의 '찻잔'을 되새김질하고 있다. youtube.com 에서 찾아서 듣고 있었는데, 원곡은 없고 비교적 최근에 라이브 한 것을 녹화한 것이라, 직직거리는 모노 음질이나 힘이 좀 떨어진 가수의 음색이 원곡의 맛을 찾기엔 역부족이었다.

얼마 전, 가까운 곳에 계시는 신부님 집에서 41도짜리 일본 소주를 홀짝이며 이 노래를 청해 들었다. 음악 전문가이기도 한 이 신부님의 콜렉션 중에는 아니나 다를까, 이 흘러간 가요가 들어 있었다. 작은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찻잔은 소주잔과도 기막히게 공명했다.

며칠 뒤, 이 곡을 달라고 떼를 써봤다. 글쎄, 김정호나 이 곡이나, 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샀을 것이다. 신부님은 다음과 같은 짤막한 글과 함께 찻잔을 보내주셨다.

이 곡은 희대의 명곡이란 생각이 들어요. 한국말 고유의 구어체를 살린, 입에 착착 감기는 가사, 일종의 minimalism에 가까운 편곡, 괜찮은 녹음 등등. 참 희한하죠. 이런 노래 하나를 통해서 그 시대 '전체'의 감성과 결을 느낄 수 있으니. 그래서 딴따라들..예술가들은 위대한 사람들이란 생각을 해요. (무단 전재 죄송)

자못 노래란 바로 이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거듭 생각한다. 나는 음악에 관한 한 대충 잡식성이며 시끄럽고 신나는 노래도 좋아하지만, 이렇게 추운 겨울밤에 오두마니 앉아서 들을 수 있는 노래란 김정호나 노고지리 같은 쪽 말고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 리듬은 마음을 아프게 만들고 그 가사는 '니가 날 떠났어 난 슬펐어'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영감과 위안을 준다.

공명. 내가 울릴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내가 울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면 지하철의 김정호나 노고지리도 한갓 소음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면 어떤 불행도 슬프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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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e ready 2008/01/27 10:39 #

    "공명. 내가 울릴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내가 울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면 지하철의 김정호나 노고지리도 한갓 소음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면 어떤 불행도 슬프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잠시 위로가 되었던 말. 오늘은 울고, 내일은 행동했으면 좋겠지만.... more

덧글

  • hotcha 2008/01/20 09:38 # 답글

    신화처럼 먼 기억의 동굴을 더듬어 흐르고 있어요.
    두고 온 많은 것들-지금은 잊혀진 것처럼 보이는 기억의 잔해들이
    동굴 속에서 떠올라요.
    노래가락이 빛의 먼지처럼 잔잔하게 허공을 떠다녀요.

    얼마전에 허락도 없이 링크를 하고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는 가로수들'의 그늘에서 쉬었다가곤 했어요.
    종종 들러도 될까요....?
  • 시노조스 2008/01/20 19:25 # 답글

    아... 이 노래 너무 좋네요. 어쩌죠. ㅠㅠ 사면 되긴 하지만 그게...

    죄송합니다. 리플을 달까 말까 고민했어요.
  • deulpul 2008/01/20 23:38 # 답글

    hotcha: 반갑습니다, 물론이죠. 요즘 같으면 따뜻하거나 더운 곳에 계신 분들이 정말 부럽네요. 저 노래는 편안하면서도 일견(일청?) 퇴폐적인 느낌이 나는데, 이렇게 들으니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의 뭉터기들을 만들어냅니다. 말이 짧은 게 새삼 안타깝습니다.

    시노조스: 에, 여기서 저 노래를 내려받으실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냥 말이 그렇다고 생각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하하. 함께 듣고픈 사람 처지에서 끼어넣은 면피용 변명쯤 될까요. 아니면 지하철 그 분들께 찻잔도 있는지 물어보시는 방법도... 하긴 그것도 해적판일 가능성이 크군요... 털썩.
  • mooyoung 2008/04/16 06:31 # 답글

    이 봄날에 청승맞게 우두커니 앉아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봄날 아침 국화차에 듣는 노래, 이런 노래가 어울리는 다방에서 역시 아침일찍 만났던 선배가 문득. 자동반복은 왜 안되죠? (그냥 투정부려본겁니다...ㅎㅎ)
  • deulpul 2008/04/17 14:48 # 답글

    답글 다느라 되돌아오니, 저까지 청승맞게 우두커니 앉게 있게 되는군요. 자동 반복은 정서 자원의 낭비를 초래하기 때문에 잘 안합니다. 두 번째 들으면 맛이 좀 떨어지잖아요? 물론 '시베리아 벌판에서 귤이나 까라' 같은 것을 제외하고 말이죠...
  • mooyoung 2008/04/18 09:26 # 답글

    저는 정서자원의 심화를 위해 mp3가 나왔을 때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또한 바닥을 치기위해서 필요할 때도 있기도 합니다. 때로는. 근데 '시베리아 어쩌구 저쩌구' 는 무슨 뜻입니까 들풀님의 글에서 본 적도 있는데..(험한 말이란게 기분나쁘라고 하는 말이니 뜻이란 게 별 필요없을지도 모르지만) 전 남자친구에게 남자들은 왜 자기몸을 험한 말할 때 쓰느냐, 어쩔 때 쓰느냐 라고 물어본적도 있습니다. 들풀님 황당하실까봐 첨언합니다.
  • deulpul 2008/04/18 13:01 # 답글

    아, 것도 맞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서도 자원이라면, 퍼서 써야 원활하게 돌기도 하죠. 어렸을 때,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팝이 나오면 녹음하려고 기를 쓰곤 했던 저로서는, 아득한 옛날 노래도 잡아 주는 mp3가 얼마나 고마운지, mooyoung님과 꼭같은 생각입니다.

    저 시베리아 어쩌구저쩌구는 어이없는 일을 벌이는 사람에게 들려주기 딱 좋은 일련의 대서사시인데, 아직 보신 적이 없으신 모양이군요. 물어보신 질문에 대한 답은... 저도 모릅니다... 아니, 그런데 "남자 친구에게"가 뭔 말씀입니까? C모님에게서 느꼈던 공포가 새삼 몰려오는군요. 역시 세상은 넓고 블로그에서 만나는 분들의 정체는 도통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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