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ime Is Always Right by deulpul

도시의 다운타운이 아니라면, 미국에서는 걸어다니기가 좀 뭣하다. 거리가 멀어 불편한 건 둘째치고, 그런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다. 언젠가 중학생 조카를 데리고 자동차 타이어를 바꾸러 갔을 때다. 한 시간쯤 걸린다고 했고 마침 점심 시간이라, 차를 맡겨두고 길 건너편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기로 했다. 길을 건너느라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서 있는데 조카가 죽으려고 한다. 창피해서.

보도를 따라 걸으면 그나마 괜찮은데 횡단보도에 서 있으면 아닌 게 아니라 좀 계면쩍다. 빨간 불에 걸린 차 안의 사람들과 일제히 눈이 마주치기 때문이다. 하늘을 쳐다봐도 뒷꼭지가 간질간질하다. 그런데, 창피함만 이겨내면 이 세팅은 좋은 자리이기도 하다. 뭘 하기에?

가까운 곳에 있는(그래봐야 걸어서 20분 거리지만) 상점에 뭘 하나 사려고 나섰다. 운동 삼아서 걸어가기로 했다. 가게 근처에는 비교적 큰 사거리가 있다. 가까이 다가가며 보니, 한 사람이 무언가를 들고 계속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계속 건넌다는 것은, 파란 불을 받고 건넜다가 기다렸다가 다시 파란 불을 받고 돌아오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좀더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그이가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졌다. "9/11 Truth Now!" 라고 씌인 피켓이었다. 이 아줌마는 차량 통행이 많은 사거리에서 바삐 지나거나 신호 대기한 차량들을 상대로 하여 말하자면 1인 시위 같은 것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며 같이 서게 됐다. 쉰 살 쯤 됐을까. 보기에도 눈매가 단단하고 강단이 세 보였다. 인사를 나누는데 종이 한 장을 건네어 준다. 종이에는 "9/11의 진실이라니? 이미 9/11 위원회가 다 조사하지 않았나? - 아닙니다"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누구지? 바보들인가? - 당신이 판단하십시오" 와 같은 문구와 함께, 관련 단체의 웹사이트가 가득 적혀 있었다.

나는 여기서 9/11의 진실과 음모론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이 추운 겨울날, 차들이 쌩쌩 다니는 교차로에서 홀로 외로이 피켓을 들고 조용히 자신이 믿는 바를 몸으로 외치고 있는 저 아줌마의 실천을 말하려고 한다.

촘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매일 밤마다 나는 많은 편지를 받습니다. 연설이 끝날 때에도 많은 질문이 내게 쏟아집니다. 그들은 모두 질문합니다: "나는 지금의 잘못된 상황을 바꾸고 싶습니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요?" 나는 콜롬비아 남부의 농민들이나 터키 남동부의 쿠르드족 사람들처럼 억압 받고 있는 사람들이나, 혹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결코 묻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말할 뿐입니다.

종종 엄청난 자유와 특권이라는 상황은 오히려 무기력한 대응을 낳기도 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지요. 그러나 조금만 노력하면 우리는 어떠한 이슈에 대해서도 무언가 보람있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어디에 살든 상관없이, 당신은 당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조직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위의 질문을 던진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답이 아닙니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는 이들이 질문하는 진정한 뜻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을 "빠르고 쉽게" 아예 "끝장내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

세상 일이란 그렇게 진행되는 게 아닙니다. 만일 당신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꾸고 싶다면, 당신은 매일매일 그 자리에 서서 따분하고도 단순하기 짝이 없는 다음과 같은 일을 꾸준한 열정으로 계속해야 합니다. 이 문제에 흥미를 가진 사람을 끊임없이 만나고 설득하고, 조금씩 조직을 확장하며, 다음 단계 일을 차근차근 준비하고 실천하며, 때로 화가 나는 것을 억누르고, 결국 어떠한 성과를 얻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세상을 바꾸는 방식입니다.


엊그제가 기념일이었던 마틴 루터 킹은 "The time is always right to do what is right." 이라고 말한다. 옳다고 믿는 일을 하기에 너무 늦은 시간이란 없다.

새 정부가 추진하게 될 재앙 운하에 반대하는 서명이 벌어지고 있다. 1월5일부터 온라인으로 시작됐다. 1월14일에 봤더니 국내외 합쳐서 11,700명 정도가 서명했다. 오늘 보니 17,100명 정도 된다. 열흘 사이에 5천 명 남짓이 서명에 참여했다. 그래도 턱없이 부족하다.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은 재앙 운하에 반대하는 의견을 가진 사람 수와 서명에 참여한 사람 수 사이의 간격을 지적하는 것이다. 잘못됐다고 말하기는 쉽다. 반대한다고 말하기는 쉽다. 덧글 달기도 쉽다. 자신의 뜻을 드러내어 조직화에 참여하는 것은 이보다 훨씬 어렵다. 그것이 1인 시위의 고단함에는 비할 수조차 없이 간편한 것이라 해도.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조금씩 바뀌는 것이다. 무성한 말만으로 세상을 바꾸기는 좀 어렵다.

표현되지 않는 의사는 아무도 고려해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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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 고리끼 2008/02/01 11:58 #

    이 세상을 위해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렇게 할 수 있고, 그것이 가능한 장소를 찾아내는 법이지. 그걸 찾아내지 못하는 사람은 게으름뱅이나 겁쟁이가 아니면, 인생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인간이야.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가길 원하지. 그런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삶은 결코 아무런 흔적도 없이 야금야금 그를 삼켜버리지 않을 거야.- 고리끼, "이제르갈리의 노...... more

덧글

  • 우유차 2008/01/24 00:04 # 답글

    슥슥. 한 표 넣은 다음. '차로 다니는 길이기 때문에' 노상강도가 없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호주나 미국에서 노상강도는 도심이 아니면 적자나는 직업이라고. 주유소에서는 당연히 셀프 주유!(인건비)
  • laystall 2008/01/24 00:22 # 답글

    읽다 자세를 바로 고쳐 앉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사은 2008/01/24 00:52 # 답글

    [종종 엄청난 자유와 특권이라는 상황은 오히려 무기력한 대응을 낳기도 합니다]
    내가 편하면, 나하고 상관이 없으면 됐지, 하고 생각하기가 얼마나 쉬운지요. 결국 하루에 하나, 지금 이 순간들을 쌓아가는 것만이 큰 변화를 일궈내는 것이다, 하고 새삼 깨달았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 deulpul 2008/01/24 01:09 # 답글

    우유차: 어휴... 눈과 손과 머리가 엄청 빠르셔요, 하하-. 노상강도도 힘들고, 집들이 멀찍이 하나씩 떨어져 있다보니 주택 강도도 쉽지가 않네요. 역시 나라를 접수하는 게 더 편하고 대박이죠. 응?

    laystall: 애고, 아침부터(미국) 혹은 오밤중에(한국) 각을 잡아서 죄송합니다...

    사은: 고맙습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나만 편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 비추어 나를 돌아보고 언제나 반성합니다. 저 역시 몸이 잘 안따라주긴 하지만요...
  • 에바 2008/01/24 07:39 # 답글

    나서지 않으면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이란 사실은 참 금방 잊어버리게 되는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 등불:D 2008/01/24 11:11 # 답글

    잘 읽었습니다 :) 투표도 하고 왔구요-
  • 은혈의륜 2008/01/24 11:29 # 답글

    잘 읽었습니다. 위의 횡단보도의 뻘쭘함은 저도 공감하는 바입니다. 저도 마트 갈때마다 종종 느끼지요.

    표현되지 않는 의사는 확실히 아무도 신경쓰지 않지만 종종 까먹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시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중히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 도시조 2008/01/24 12:08 # 답글

    킹 목사.....역시 큰인물...
  • deulpul 2008/01/25 02:57 # 답글

    에바: 세상이 우리를 좀 무기력하게 만들어주는 탓도 있다고 봅니다. 힘 빠지는 세상이에요. 고맙습니다.

    등불 : D: 함께 해 주셔서 더욱 고맙습니다.

    은혈의륜: 자기 암시 신공을 사용하십시오. 걸을 땐 무조건 운동을 위해서라고 암시하는 것입니다. 칭찬은 코끼리도 춤추게 하고 자기 암시는 없는 학위도 만들어내니, 뻘쭘함 정도는 쉽게 극복하실 수 있을 겁니다...

    도시조: 큰 인물을 잊지 않고 잘 기리고 그 뜻을 이어가는 모습도 좀 부럽습니다. 미국 사회에서 인종 문제가 해결되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MLK 같은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 아닐까도 싶네요.
  • 소아나 2008/01/25 17:30 # 답글

    잘 읽었습니다. 촘스키의 말을 읽고 반했습니다. 책을 한 번 읽어보고 싶군요...
  • deulpul 2008/01/25 19:22 # 답글

    서점 사이트를 검색했더니 한국에 번역된 책도 무척 많은 것으로 나오네요. 너무 전문적이지 않은 것으로 고르시면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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