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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4월 23일
1. 내가 사는 곳에는 '수돗물 전도사'라고나 할 한국인 교수가 있다. 이 사람에 따르면 (미국이든 한국이든) 정부에서 관리하는 수돗물은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안심하고 얼마든지 마셔도 된다는 것이다. 저 혼자 그렇게 생각하고 저 혼자 그렇게 퍼 마시면 좋은데, 남까지 그렇게 만들려고 기를 쓰니 문제다.
내가 사는 곳의 물은 석회 성분이 많이 든 센물이다. 그 정도가 좀 심한 편이라서, 일반 비누는 거품도 잘 일지 않고, 수도꼭지 주변은 두어 주만 그냥 놔두면 하얗게 석회가 쌓인다. 물맛도 별로다. 따라서 이런저런 이유로 물을 사 먹는 사람이 많다. 사 먹는 물에는 다른 지역에서 생산한 지하수도 있고 수돗물을 다시 걸러서 만든 물도 있다. 이런 물에는 물론 석회 성분이 훨씬 적다. 수돗물 전도사 교수는 이렇게 물을 사 마시거나 쓰는 사람을 보면 거품을 문다. 멀쩡한 수돗물을 왜 마시지 않느냐에서부터 시작해, 공부하라고 보내놨더니 물 사 먹는 것 같은 쓸데없는 데 돈을 낭비한다고 힐난하며, 따라서 수돗물을 마시지 않고 물을 사 먹는 사람은 국익을 갉아먹는 존재라고까지 비난한다. 자신은 마시지도 않는 한국 수돗물까지 마시라고 난리다. 이 사람은 가끔 한국 신문의 독자편지 같은 데 글을 보내, 한국 수돗물이 얼마나 안전한지, 생수를 사 마시는 한국 국민이 얼마나 덜떨어진 사람들인지를 강조한다. 한국 최종 소비지의 노후한 수도 시설 같은 것은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 이 교수에게 개인의 입맛이나 취향 같은 것은 아무런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저, 물을 사 마시는 사람은 근거 없는 이야기에 휘둘리는 무식한 백성일 뿐이며, 미국에서의 경우 한국의 국익을 낭비하는 매국노까지 되는 것이다. 이 교수는 얼마 전 결석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센물과 결석과의 관계는 내가 아는 한 아직 논란이 되고 있으므로, 이 교수의 결석이 오로지 물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2. 사람의 건강과 관련해 논란이 있는 문제에 대해 과감하게 문제 없다고 단언하는 사람들을 보면 좀 무섭다. 물론 확인되지 않은 근거에 기반해 나도는 경계론에 대한 반작용이겠지만, 수많은 사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에 대해 그렇게 자신할 수 있는 과감함이 섬찟하기도 하다. 이런 과감함은 어디서 나올까. 이른바 과학적 근거와 확률인가. 3. 한국에이즈퇴치연맹의 홈페이지에는 상담 게시판이 있다. 이 곳의 단골 상담 문의 중 하나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며칠 전 친구들과 어울려 사창가를 찾았습니다. 술김에 콘돔을 쓰지 않고 했는데, 어제부터 갑자기 몹시 피곤하고 입안이 헐고 열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에이즈에 걸린 것일까요? 상대녀가 바이러스 보균자였다면 저는 에이즈에 걸린 것인가요?" 이런 눈물겨운 사연에 대한 상담원의 조언에서 빠지지 않고 꼭 붙는 내용이 있다. 그건 다음과 같다. "상대방이 보균자라고 하더라도 1회의 성관계를 통해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될 확률은 0.5%(정확히 기억나지 않음) 정도입니다. 그러나 실제 감염된 사람에게는 이 확률이 의미가 없습니다. 불안하시면 가까운 보건소를 찾아 검사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4. 0.01%의 확률이라도, 0.00001%의 확률이라도, 재수없게 걸린 사람에게는 그냥 100%가 되는 것이다. 확률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이 말이다. 건강은 로또가 아니기 때문에, 맞으면 좋고 아님 말고가 안 되는 것이다. 감염된 사람을 앞에 놓고 "천 명 중 한 명, 만 명 중 한 명 걸릴까말까한 병에 걸렸으니 안심하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면 "천 명 중 한 명 걸릴까말까한 확률에 당첨되었으니 그냥 재수없었다고 생각하고 운명을 받아들이셈" 할 수 있겠는가. 혹은 더 나아가 "천 명 중 한 명 걸릴까말까 하니 예방책 없이 마음껏 성관계를 즐기십시오" 할 수 있겠는가. 5. 그래도 에이즈 바이러스의 경우는 다행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당첨'되었는지 아닌지를 조만간에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보건 문제에서, 자신이 0.001%에 속할지 99.999%에 속할지는 걸려 보기 전까지는 모른다. 아니면 죽기 전까지는 모른다. 확률에 기대는 사람들은 이 점을 모르거나 무시한다. 걸리고 나서 알면 참 행복하기도 하겠다. 6. 보건 문제의 확률을 이야기할 때, 일상 위험의 확률을 들어 문제를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컨대 수입 쇠고기로 광우병 걸려 죽을 확률보다 자동차 타고 다니다 교통사고로 죽을 확률이 더 높다든가. 이것은 고전적인 논리적 오류다. 해당 문제와 직접 상관 없는 다른 문제를 끄집어 내서 그것을 근거로 해당 문제를 판단하려는 것이다. 교통사고와 에이즈나 광우병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교통사고는 교통사고대로 조심하고 주의해야 할 문제고, 에이즈나 광우병은 그것대로 조심하고 주의해야 할 문제다. 교통사고 확률을 근거로 광우병 위험을 판단하는 사람들은, 교통사고 확률보다 낮은 피부암 발생 따위 걱정되지 않으므로 UV 차단제 안 쓰시는지? (그런데, 확률과 과학적 근거 좋아하는 사람들이 교통사고 확률을 정확히 지적하여 쓴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는 듯하다.) 이런 논리를 확장하면 인간이 보건 건강 위생에 신경쓰고 주의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게 된다. 어차피 죽을 거(확률 = 100%), 이 확률보다 낮은 어떠한 건강 문제에라도 신경 쓸 필요가 있는가? 교통사고 확률은, 예컨대 비행기가 겁나 못 타는 사람에게 차를 타고 다닐 때의 사고 확률이 더 높다고 말할 때처럼, 관련 있는 문제를 이야기할 때에만 의미가 있다. 다른 건강 위험 요소, 예컨대 담배나 고지방 물질을 예로 든 것도 봤는데,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암, 심장병 같은 데는 하나도 신경쓰지 않으면서 유독 광우병만 갖고 난리라면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있던가? 7. 아직 전모가 밝혀지지 않고 현재진형형인 사안의 경우는 더욱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학적 근거라고 나온 것도 그 결과가 아직 한시적일 수밖에 없다. 한 개인이 이러한 근거를 모두 포용하고 판단하는 것도 아니다. 수년, 수십년 잠복기 운운하는 병의 대처를 논하면서, 이제 막 드러나기 시작한 숫자만으로 문제 없다고 판단하는 것은 지나치게 과감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쇠고기를 먹고 광우병에 걸릴 확률이 100만 명 당 한 명이라고 해 보자. 쇠고기를 먹은 사람 100만 명 중 한 명이 이 병에 걸렸다. 별로 높지 않은 확률이므로, 내가 이 정도 확률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소리 높여 외쳤다고 해 보자. 내 말을 듣고, 쇠고기를 경계하던 사람 2백만 명이 추가로 쇠고기를 먹게 됐다. 내 주장은 두 명을 광우병으로 이끌었다. 나중에, 이 확률이 10만 명 당 한 명으로 조정 발표되었다. 내 주장은 20명을 광우병으로 이끌었다. 이 20명으로 고통 받는 사람은 적게 잡아도 100명이 넘을 것이다. 자기 말을 듣고 어떤 행동을 하다 불행한 결과를 당한 사람에게 어떻게 말할 것인가. "그건 당신 사정이지" 할 것인가? "원래 그런 정도의 확률은 있었단 말이지" 할 것인가? 8. 자신이 실험실의 모르모트가 되겠다면 말릴 수는 없다. 그러니까, 광우병에 걸릴 확률이 형편없이 낮고, 걸려도 언젠가 치료 방법이 개발될 것이기 때문에, 저는 앞으로 미국산 쇠고기를, 햄버거든 갈비든 육골이든 내장이든 얼마든지 마음껏 먹겠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 딸에게도 얼마든지 먹이겠습니다, 하고 선언하고 실천하시기를 바란다. '과장된 공포'에 떠는 사람들에게는 그나마 그 편이 훨씬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제발 함께 실험대에 오르자고 하지는 마시기 바란다. 처먹는 것 남에게 알리기 좋아하는 2MB도 매일 아침 수랏상을 수입 쇠고기 육골즙으로 하는 것이다. 잠복기가 몇십 년이랬으니 곧 죽을 사람만으로는 안 되고, 아들 손자까지 모두 함께 드시는 것이다. 이런 장면을 매일 찍어서 내보내면, 국민 모두는 감읍하고 미국산 수입 쇠고기를 환영해 마지 않을 것이다. 9. 보건 건강 문제 대부분은 그저 숫자 게임이 아니라, 아주 치열한 경제 사회 문제이기도 하다. 확률만 운운하는 사람들은 이 점에 대해서도 무지하거나 무시한다. 2MB가 굶주리는 한국 국민을 불쌍히 여겨, 안 주겠다는 미국을 협박하고 구슬려 겨우 쇠고기를 따내 왔다면, 아직까지 알려지기론 하찮은 그까짓 광우병 확률쯤 무시하고 감사히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이 그렇게 되어 온 건가? 물건을 팔아 먹는 놈은 마약이라도 팔아 먹는다. 조기에 납덩어리를 넣어서라도 팔아 먹는다. 미국 쇠고기가 한국에 꾸역꾸역 밀려 들어오는 것은 한국 대통령이 국민을 염려하여서가 아니라 미국 업자들이 밀어부쳐서이다. 쇠고기 광우병 담론이 그저 한가한 과학 논쟁이 될 수 없는 것은 이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10. 물론 아직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지나치게 부풀려 위기를 조장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다.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정확히 아는 것이니까. 그러나 이런 태도가 잘못된 것만큼이나, 현재의 제한된 지식을 근거로 남의 미래를 담지하겠다는 태도 역시 무책임하지 않은가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