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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이성복, '남해 금산') 그럴 때가 있다. 삶이 재미없을 때. 남에 실망하고 나에 실망하는 날이 거듭될 때. 이건 아마 떠나라는 신호일 것이다. 아마 그런 때 중 하나겠지, 삶이 재미없던 2월의 어느 날. 저녁 나절쯤, 버스는 남해읍에 도착했다. 겨울 해는 일찌감치 지고 나는 낯선 땅에 내렸다. 상주 가는 버스는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 탈 수 있었다. 배낭을 메고 버스를 내리니 마을 불빛이 어른어른하는데, 어디까지가 땅이고 어디서부터가 물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겨울 하고도 평일, 어둠이 내린 바닷가 마을에서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웠다. 천천히 걸어가서 우선 민박 간판이 걸린 집을 찾았다. 식당과 민박을 함께 하는 집이 있어, 방을 잡았다. 배낭을 내려놓고 식당으로 와서 밥을 먹는다. 숟갈로 찌개를 떠먹다가, 아버지뻘 나이 되는 주인장에게 소주를 한 병 달랬다. 혼자 여행이며 등산을 다녀버릇하면 홀로 걷고 홀로 노는 데는 익숙하게 되는데, 불편한 경우도 종종 있다. 술 마실 때가 그 중 하나다. 특히 이렇게 연로하신 어른이 부채나 파리채를 들고 지켜보는 식당에서 내가 내 소줏병을 들고 내 잔에 따라 마시려면 누가 뭐라지 않는데도 뒷꼭지가 간질간질하다. 삶에 실망을 덜 해서 그럴 것이다. 텔레비전 드라마 소음을 친구 삼아서 밥과 술을 잘 먹고, 옆의 구멍가게에 들어가 하이트 두 캔을 샀다. 비닐봉지를 끼고 모래밭으로 나왔더니 하늘의 별이 총총이다. 한 번도 내 눈으로 본 적이 없는 상주의 바다는 바로 그 앞에 서서도 모양이 짐작되지 않았다. 그저 찰랑이는 물소리가 부드러워서, 비릿한 냄새가 나는 모래를 깔고 누웠다. 옆에 사람이 있어 시시한 농담을 하거나 즐거이 말싸움을 하거나 정답게 속삭여야 할 때, 사람이 없으니 나를 잡고 말하려 애쓴다. 이럴 땐, 의식적으로 세상과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려 하지만, 실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혼자 다니는 여행은 몸을 아주 괴롭히는 쪽과 몸이 아주 편한 쪽이 있다. 몸이 아주 편한 여행에서는 오히려 생각이 잘 되지 않는다. 왜 우리는 일출에 매달리는 것일까. 언제나 해는 다시 떠오르고 오늘은 그 언제나의 하루일 뿐인데, 우리는 알면서도 오늘의 일출에 소박하게 매달린다. 삶에서 찾기 어려운 희망을 먼 하늘에서라도 찾아 확인하고 싶은 것일까. 금산 꼭대기까지의 시간을 계산해 민박집을 나섰다. 험한 야간 등산도 아니니까 그냥 집에서 쓰는, 대형 배터리를 넣는 랜턴을 들었다. 이른 시간이라 차가 다니지 않는 국도를 따라 한참 올라가면 산 입구가 나온다. 이제부턴 산길이다. 등산로로 들어선 지 10분쯤 지났다. 랜턴의 빛으로 어둠을 밀어내며 천천히 오르는데, 갑자기 랜턴이 만드는 작고 동그란 세상 안으로 큰 무덤이 불쑥 들어온다. 이런, 계시면 계신다고 미리 알려나 주실 일이지. 간이 작아 괴기영화도 못 보는 나는, 뒤에서 누가 내 다리 내놓으라고 쫓아오는 것 같아 걸음이 바빠진다. 굴을 지나고 계단을 오르며 시간 반 숨가쁘게 발을 옮긴다. 그림은 내려올 때 보기로 한다. 날이 푸르스름하니 밝아질 때쯤 보리암에 도착했다. 이름만 암자다. 조금 더 높고 조금 덜 번잡한 곳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긴다. 지난 해 잘 자라났던 허리 높이 풀숲 사이로 길을 걷는데, 개 한 마리가 뛰어왔다. 떡대 좋은 누렁이다. 그런데 옆구리 털 일부가 파랗다. 자세히 보니 누군가가 누렁이의 몸뚱이에 파란 스프레이 페인트로 '단결'이라고 써 놨다. 근처에는 군사 시설로 보이는 건물이 있었는데, 여기서 먹이는 개 같았다. 단결이는 적당히 오줌도 싸 가면서 억새풀 사이를 신나게 헤치고 다니다 어딘가로 사라졌다. 바위 위에서 바다를 내려다 본다. 중간중간 산이 솟아 있는 바다를 내려다보며 무엇을 생각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희한하게도 금산을 내려오던 길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산과 바다의 강렬한 아름다움 탓에, 자잘한 기억쯤은 모두 빛이 바래 사라져 버렸는지도 모르고, 3대 관음성지의 하나로 손꼽히는 보리암에 우뚝 서 계신 관음보살께서 사소한 일은 떨구며 살라고 하신 탓인지도 모른다. 오래 전의 금산 여행이 생각난 것은, 어청수가 자기도 원래 불교도였다며, 금산 보리암에 가면 자신이 절하는 사진이 있다고 말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랬구나. 그도 저 곳에 다녀간 적이 있구나. 나는 문득, 옆구리에 파란 스프레이 글자를 새기고 천방지축 뛰어다니던 누런 개 생각이 났다. 혓바닥을 빼어물고 침을 흘리며, 늦겨울 산 정상을 제 집처럼 휘젓고 다니던 그 개가 생각난 것은, 시민 사냥에 혈안이 된 경찰 동영상을 보고 난 탓이었지도 모른다. 아서라, 시인 이성복은 남해 금산의 바위 속에서 사랑스런 여자를 끌어내는데, 나는 기껏해야 그 옛날 잡종견이나 생각하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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