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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저녀 단상 3 : 루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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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은 종이 매달려 있는 보신각이 서울에만 있는 줄 알지만, 사실 보신각의 원조는 강원도 치악산 상원사에 있는 보신각이다. 치악산 상원사는 오대산 상원사와는 다른 절이다. 절로서는 오대산의 것이 유명하지만, 치악산의 상원사는 보신각과 그에 얽힌 전설로 유명하다.
옛날 어떤 토목장(土木匠)이 산길을 바삐 걷고 있었다. 한성에서 굵직한 물길 공사를 벌인다며 토목장을 불렀기 때문이었다. 보통 같으면 전갈을 받고 한 스무 날 잡아 천천히 갈 일이지만, 웬 급살들을 맞았는지 급히 오라고 보채는 바람에 동지 섣달에 밤을 낮삼아 걷기를 이틀째였다. 길은 치악산 자락으로 접어들었다. 자갈돌 깔린 너덜겅 산길을 걷던 토목장의 귀에 자지러지게 깍깍대는 날짐승들 소리가 들려왔다. 웬일인가 싶어 모퉁이를 돌아섰더니, 웬 큼직한 구렁이 한 마리가 수많은 까치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구렁이는 여기저기 쪼여서 온 몸이 피투성이인 채 괴로워하며 뒹굴고 있었다. "허, 그 참, 희한한 일도 다 있다. 날짐승이 저 잡아먹는 배암을 공격하다니." 토목장은 놀라면서도, 저도 모르게 길에서 손에 마춤한 돌을 들어 까치들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까치들은 토목장의 돌팔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구렁이를 계속 쪼고 할퀴었다. 토목장은 한낱 날짐승에게 무시당한 듯하여 기분이 상했다. 등에 지고 있었던 삽과 공구 봇짐을 내려놓은 토목장은, 본격적으로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한 식경이나 흘렀을까. 미친듯이 돌을 던지던 토목장은 사위가 조용한 데 놀라, 팔매질을 멈추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극성맞은 까치들은 모두 거꾸러지거나 달아나고, 구렁이는 여전히 꿈틀대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구렁이의 형상은 어딘가 심술궂고 욕심스럽게 보여, 짐승인데도 단박에 정이 가는 것이었다. 꿈틀대고는 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그 새끼, 엄살은!" 옆을 보니, 토목장의 돌팔매를 맞고 땅에 처박혀 죽은 까치들은 얼핏 보기에도 7, 80 마리는 되는 듯했다. 구렁이가 죽지는 않겠기에, 토목장은 버려 두었던 삽과 공구를 챙겨들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F. O.) (F. I.) 날이 저물었는데도 계속 내쳐 걸은 것은, 이 길이 그다지 낯설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겨울이라 해는 빨리 지고, 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은 그것이 그것 같았다. 땅거미가 지고 찬 하늘의 별 색이 짙어질 즈음, 토목장은 결국 길을 잃고 말았다. 얼굴과 손 여기저기를 긁혀가며 마른 풀숲을 헤친 지 서너 시간, 사위는 아무 것도 분간할 수 없이 캄캄해졌다. 때는 일경(一更)이나 된 것 같았다. 캄캄한 계곡 너머로는 들짐승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산 공사, 물 공사, 공중 공사까지 다 거친 베테랑 토목장도 두려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기인~밤 지새우고 푸울닢마다 맺힌, 이슬보다 더 고오~운 아침 진주처어럼..." 그 뒤는 가사가 생각나지 않았다. 앞 소절만 30회쯤 불렀을까. 저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보이는 듯했다. (F. O.) (F. I.) 대문을 열어준 사람은 젊은 처자였다. 머리를 올린 것으로 보아 혼인은 한 듯한데, 집 안에 다른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길도 없고 인적도 없는 이 깊은 산 속에 집 하나가 덩그러니 있다는 것도 희한하고, 그 집에 혼인한 듯한 젊은 여인네가 홀로 산다는 것도 희한한 일이었다. '과부집인가? 보통 20명 대기인데 혼잘세...어쨌든 지나치게 예쁜 걸 보니 서비스는 별로일 것 같군.' 그래도 일단 시도는 해 보기로 했다. 이제 살았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시장기가 견딜 수 없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철 든 이래, 밥이란 남에게 얻어먹거나 뺏아먹는 것이라는 신조로 살아온 토목장은, 그 답게 불쑥 한 마디를 던졌다. "저는 배가 고픕니다." 여인은 토목장의 염치 없는 말에,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고 나서 나직하게 말했다. "앗다 작것이, 밥도 하나 못 빌어처먹고 밤새 어딜 쏘댕기고 지랄헌디야, 지랄이." 욕을 퍼부으면서도 여인은 국밥 한 그릇 정갈하게 말아 내 놓았다. 여인은 방문을 열고 나가려다 잠시 멈춰서더니, "이 놈아, 어쨌든 꼭 살려라잉? 알것제야?" 하고 알쏭달쏭한 말을 하고 나갔다. 뭘 살리란 말인가? 이 오밤중에... 토목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꼬추를 살리란 말인가? 잠시 생각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밥숟갈을 입에 퍼넣기 시작했다. (F. O.) (F. I.) 밤길을 헤멘 끝에 밥까지 배불리 먹은 터라, 곧 잠이 몰려왔다. 단잠을 자던 토목장은 언젠가부터 목이 조이는 악몽을 꾸면서 숨이 막히는 통에 잠을 깼다. 아니 그런데, 가위 눌린 줄 알았더니, 잠을 깨고도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토목장은 눈 앞에 벌어진 광경에 기절을 할 만큼 놀랐다. 토목장이 자던 방은 어디선지 몰려온 까치떼로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가득 차 있었다. 까치들이 온통 빽빽히 메우고 있어서 몸을 일으킬수도, 돌릴 수도 없었다. 주최측 추산 10만, 경찰 추산 2만 까치들은 일제히 토목장을 향해 발을 내리누르고 있었는데, 한 마리로는 엽전 너댓 냥 무게인 것들이 방 하나 가득 차서 짓누르니 마치 15톤 레미콘 트럭에 깔린 듯,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헉, 헉, 마.. 말로 합시다, 소.. 소통합시다. 소.. 소통! 소통!" 토목장은 자세를 있는 대로 낮추며 부르짖었다. 몸을 낮추는 척 하니 숨 쉬기가 조금은 나아졌다. 까치떼 중에서도 몸집이 크고 눈빛이 형형한 놈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오늘 네가 돌을 던져 죽인 까치들은 모두 우리 가족이며 형제들이다. 우리가 죽이려 하던 그 구렁이는 걸핏하면 치악산 까치들을 괴롭히고 물어죽이고 못 살게 굴기에, 괴롭힘을 당한 지 어언 1년, 온 산의 까치들이 힘을 합쳐 구렁이를 물리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네가 나서서 구렁이를 살리는 바람에, 힘없는 우리 까치들은 몰살까지 당했다. 이제 우리가 너에게 원수를 갚을 것이다." 하고는 토목장의 목을 날카롭게 쪼기 시작했다. 다른 까치들도 일제히 토목장의 몸을 공격해 왔다. "자... 잠깐, 잠깐. 이거 너무하지 않습니까. 치악산 다섯 고개 중에서 이제 고작 한 고개 넘으면서 벌어진 일로 저를 죽인다면 억울합니다. 전 재산 다 내놓고 법과 원칙을 지키며 살테니 제발 좀 봐주십시오." 눈빛이 형형한 까치가 말했다. "네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기 어렵다. 다만 네게 한 번의 기회는 주겠다. 이제 곧 자정이 되는데, 자정이 되어 해가 바뀌기 전에 상원사 보신각 종이 세 번 울리면 네 목숨을 살려주도록 하마. 크하하핫!" 크하하핫? 까치가 웃은 이유는 명백했다. 상원사에는 종이 있긴 하지만, 종을 치는 당목(撞木)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종 안으로 종불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목도 없고 종불알도 없는 상원사 종은, 치악산 산마을에 사는 가장 늙은이의 기억으로 봐도 이제껏 울려본 적이 없다. 토목장은 절망감에 빠졌다. 아아 이렇게 죽는구나. 까치에게 쪼여 죽다니, 참 내 인생도 어이가 없다. 죽는 것도 하필이면 섣달 그믐날이란 말이냐. 바로 그 때였다. 차가운 밤 공기를 찢고 어디선가 은은한 소리가 울려왔다. "두우우우우웅~~~~!" 앗? 토목장을 쪼고 누르고 할퀴던 까치들이 일제히 공격을 멈추었다. 토목장도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일인가? 울릴 수 없는 종이 울리다니? 귀를 의심했지만, 까치들도 종소리를 들은 것이 틀림없었다. "두우우우우우우웅~~~~~!" 첫 번째 종의 긴 꼬리가 사라질 즈음, 두 번째로 종이 울렸다. 이것은 종소리가 확실했다.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두우우우우우우우우웅~~~~~~~~!" 세 번째 종이 긴 맥놀이로 공기를 흔들며 울려 퍼졌다.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까치들은 서로 눈을 마주보며 어이없어 했다. 한 까치가 말했다. "까짓, 없던 일로 치고 하던 일 마저 끝냅시다!" 다른 까치가 말했다. "그럽시다. 아까 한 말은 그냥 명의만 빌려주고 한 거라고 치고." 눈빛이 형형한 까치가 짧게 말했다. "우리까지 같은 놈 되어서는 쓰겠냐. 가자!" 주최측 추산 10만, 경찰 추산 2만 까치들은 토목장을 누르던 몸을 빼서 일제히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토목장은 큰 숨을 몰아쉬었다. 저승 문고리를 잡다 돌아온 셈이었다. (F. O.) (F. I.) 날이 밝자 토목장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기가 자던 집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자신은 큰 바위 위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거나 말거나, 토목장은 얼른 삽을 챙긴 뒤 상원사로 달려갔다. 도대체 종이 어떻게 울렸는지, 누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었는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미끄러지고 자빠지며 산길을 오른 토목장은 이윽고 인적 끊어진 상원사의 보신각에 이르게 되었다. 울릴 수 없는 종이 울려 토목장의 목숨을 구한 바로 그 종이었다. 천천히 종루로 올라 종 밑을 살펴보던 토목장은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종 밑에는... ...... 토목장은 처음 보는 복잡한 기계와 장비들이 놓여 있었다. 쌀뒤주에 단추가 잔뜩 달린 것도 있었고 길다란 말뚝에 양가죽을 덮어 씌운 듯한 것도 있었다. 그 한쪽으로 엄청나게 큰 나팔 같은 게 대여섯 개, 토목장이 죽을 뻔한 그 집 방향을 바라보며 설치되어 있었다. 그 쌀뒤주며 말뚝이며 나팔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새겨져, 막 떠오르는 새해 아침 햇살을 받으며 반짝이고 있었다. "KBS" (나레이션) 하찮은 미물도 온 정성을 다해 은혜를 갚는다는 치악산 보신각 전설.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이 간절한 사연은 전설이 되어, 오늘도 치악산을 오가는 나그네들의 가슴을 저리며 전해 내려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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