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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A 집단은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사업을 하나 새로 추진하려고 하는 중입니다. 예컨대 한 공공 건물을 부수고 현대식으로 새로 짓는 재건축 사업이라고 합시다. 이 사업이 완료되면 보기도 좋고, 실제로 많은 사람이 이 건물을 이용하기가 편해지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돈입니다. 재건축에 상당한 돈이 드는데, 뾰족한 자금줄이 없습니다. 그래서 공동체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일정한 금액을 할당해 강제 징수하기로 했습니다. 이 공동체의 법규에 따르면,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의무를 지우는 정책을 추진하려면 구성원 전체에게 의견을 물어 그 뜻에 따라야 합니다. 찬반 투표(referendum)에 부쳐야 하는 것이죠. 물론 찬반 투표 회부를 위해 발의하려면 먼저 일정한 사람, 예컨대 500명 이상의 서명이 필요합니다. 이에 따라, A 집단은 자신들이 먼저 서명을 한 뒤, 서명지를 들고 공동체 곳곳을 돌며 서명을 받았습니다. 며칠이 지나 500명 서명을 획득했고, 덕분에 공동체 대표를 선출하는 연례 선거에서 재건축 사업에 대한 찬반 투표를 선거 안건에 포함시킬 수 있었습니다. 투표 결과, 이 사업은 투표자 과반수의 지지를 받지 못해 부결되었습니다. 찬성 30%, 반대 60%, 기권 10%였습니다. 아마도,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공공 건물 재건축이 주는 효용보다는 당장 내 주머니에서 돈이 나가는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한 듯 했습니다. 집요한 반복 발의 끝에 결국 통과 A 집단은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1년이 지나 다시 선거철이 되자, 이 재건축 사업을 또다시 투표에 부치기로 했습니다. 다시 500명의 서명을 받았고, 찬성 의견을 높이기 위해 광고 및 홍보 작업을 대폭 강화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투표 결과, 재건축 사업은 다시 부결되었습니다. 찬성 40%, 반대 50%, 기권 10%였습니다. 다시 1년이 지났습니다. A 집단은 여전히 이 사업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500명의 서명을 받아, 안건을 찬반 투표에 회부했습니다. 그리고 홍보 활동을 몇 배로 강화했습니다. 지역 매체 광고, 가두 캠페인, 방문 면접, 각종 설명회 개최, 홍보 전단지 살포 등, 이전에는 볼 수 없던 모든 방법이 동원되었습니다. 세 번째 투표 결과, 이 사업은 가결되었습니다. 찬성 55%, 반대 40%, 기권 5%였습니다. 제가 사는 곳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일입니다. 찬반 득표율 수치는 조금 단순화시켰습니다. 개인적으로 이것은 좀 어이없는 상황으로 보였으며, 민주 제도의 맹점 중 하나인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일단 부결된 것을, 선거 있을 때마다 다시 제기하여 '될 때까지 한다'는 양상을 보였으니, 이건 다른 의미에서 '떼법' 아닙니까? 제도의 측면에서 볼 때, 전체의 뜻으로 부결된 안건은 다시 회부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제한을 두는 방법이 있을텐데, 이는 불합리한 제도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습니다. 상황이란 자꾸 변하게 마련이니, 1년 전엔 불필요했지만 1년 뒤에 아주 시급한 필요성이 생길 수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또 안건의 내용을 조금 바꿔서, 새로운 안건으로 포장해 제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반대쪽에서는 이런 방법을 동원하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무엇을 하자는 주장은 반복하여 개진하기가 쉽지만, 무엇을 하지 말자는 주장은 그 속성상 피동적이며, 따라서 자생적으로 생명력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컨대 안건이 일단 가결되면, 그 뒤 반대측이 일년 동안 사업의 부정성을 홍보하고 다시 안건을 투표에 붙여 백지화하기(nullify)가 어렵습니다. 그런 방안은 별로 없거나 있더라도 적용하기가 매우 힘듭니다. 이미 예산 다 짜서 삽질 시작한 사업을 중간에 폐기하기란 곤란하죠. 일년 동안에 옛 건물 다 부수고 터까지 닦았는데, 이제 와서 새로 투표해서 부결시킨다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정책의 안정성인가 연속성인가 하는 것도 고려해야 하고요. 어쨌든 이런 맹점을 이용해, 위의 A 집단은 줄기차게 안건을 제기하고 갈수록 홍보를 강화한 끝에 결국 뜻을 이루었습니다. 다수 의견이라도 드러나고 조직화되어야 한다 제도 말고 전략적인 부분도 흥미로웠습니다. 문제의 사업 추진 과정은 1) 강력한 목적 의식과 추진 의욕을 갖고 있는 소수 집단이 전체 이해와 관련이 있는 특정 사업을 죽어라 추진하면 결국은 성사시킬 수도 있다는 점, 2) 대체로 뚜렷한 의견을 갖지 않은 대중을 집중 공략하면 얼마든지 자기 편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 3) 관건은 사업 자체의 정당성이나 시행 방안의 합리성이 아니라, 얼마나 열심히 홍보를 하느냐라는 점 등을 생생히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첫째, 추진측은 A 집단을 중심으로 하여 강력하게 결속되어 있는 데 비해, 반대측은 '반대하는 개인'은 많아도 강력한 구심점이 없었습니다. 누구나 반대하는 것처럼 보였으니, 개개인들은 '설마 이루어지랴' 하고 안심한 측면도 있었겠죠. 다수 의견일지라도 조직화되기 전에는 산발적 아우성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둘째는 역시 틀짓기(framing) 싸움이라는 점입니다. 이 재건축 사업을 놓고 추진측과 반대측은 서로 다른 틀을 갖고 있었습니다. A 집단은 옛 건물의 낙후성과 새 건물의 편의성을 집중 강조하여, 건물 자체에 이슈의 초점을 맞추려고 애썼습니다. 반대측 대응의 초점은 재원 조달 문제, 즉 모든 구성원이 불요불급한 일에 돈을 짜내야 한다는 점에 맞춰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물고 늘어지며 의견을 확대하지 못했습니다. 그럴 주체가 없다는 첫 번째 이유와도 연결되긴 합니다. 어쨌든 반대측은 "옛 건물이 정말 그렇게 낡아서 못쓸 정도냐? 한번 따져보자" 하는 식으로 대응하기도 했는데, 이는 추진측의 틀에 발목이 잡히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여러 모로 공부가 된 사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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