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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그냥 잘 먹고 잘 논 오후였지만, 소년의 어머니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소년이 동무의 생일 잔치를 다녀온 날 저녁에, 소년의 어머니는 몇 사람이나 모였는지, 음식은 무엇이 나왔는지, 그의 부모는 무얼 했는지를 자세히 물었다.
생일이었던 친구의 집은 마을에서 아주 잘 사는 집 중 하나였다. 시장 근처에 약국을 했는데, 동네에 있던 약국 서넛 중에서 제일 큰 약국이었다. 3학년을 마치고 잠깐 쉬는 봄방학, 밖에서 놀기에는 춥고 안에서 놀기에는 답답해서 나무 대문을 들락이다가 볼이 트는 어느 날이었다. 그 친구가 생일 잔치를 한다고 몇몇을 자기 집으로 부른 것이다.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생일이란, 집에서 어머니가 끓여주는 미역국을 아침으로 먹고, 혹시 운이 좋으면 48개들이 왕자파스 한 상자나 동화책 몇 권, 더 운이 좋으면 멜빵이 달린 새 바지 하나쯤 얻어 입는 날이었다. 친구를 초대하고 잔치를 하는 일은 듣도보도 못했다. 소년뿐 아니라, 소년의 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은 모두 그랬을 것이다. 어른 생일도 제대로 못 챙기는 판에, 아이 생일을 챙겨줄 겨를이 없었다. 약국집 친구의 생일 잔치는, 말하자면 작은 시골 사회에 문화적 충격 같은 파장을 던졌다. 몇몇을 자기 집으로 불렀다고 했지만, 막상 가 보니 스무 명 남짓이나 되었다. 그 스물 넘는 아이들 중 대부분이, 생일 케익이 어떤 맛이 나는지를 그날 처음 알게 되었다. 글쎄, 생일이란 누구나 공평하게 일년에 하나씩은 갖고 있는 것이고, 그렇지만 그 생일의 양상을 보면 두루 공(公)자를 쓰기는 좀 어렵다는 걸 어렴풋하게나마 깨닫을 수 있을 정도로 철이 좀 났더라면, 마냥 신기하고 마냥 신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소년을 비롯한 아이들이 그 집의 거실과 마당을 오르내리며 신나게 논 것을 보면, 아직은 경제적, 혹은 계급적 자각을 갖기엔 너무 어렸던 것이 틀림없었다. 하긴, 약간의 시샘도 생각이 있는 놈들에게서나 발견할 수 있는 것이긴 하다. 그러나 초봄의 한 날에 한 주머니에서 꺼내 뿌린 깨가, 매미 소리 나기 시작할 즈음이면 제각각의 키와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얼추 일러 초등 4학년이라는 엉성한 범주에 함께 들어가더라도, 소년 소녀들은 사실은 제각각이었다고 해야 정확한 말이었다. 그 중에서 눈에 띄게 쑤욱 웃자라 있던 것은 대개 소녀들이었다. ---- * ---- * ---- 소년의 어머니가 약국집의 생일 잔치를 자세히 물어본 것은, 그게 처음 있는 일이기도 했거니와, 한두 달 뒤면 바로 소년의 생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마음을 알 리 없는 소년은 어머니가 왜 그렇게 꼬치꼬치 묻는지 의아해 하며 건성으로 대답했다.4학년이 시작된 지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소년은 아침부터 머리가 복잡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이 날은 소년의 생일이었는데,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어머니가 "있다가 학교 끝나고 올 때 친구들 셋만 데려와라" 했던 것이다. 아이, 왜 하필이면 셋이람. 수업이 끝나면 같은 반 친한 애들이 다 같이 놀 텐데, 그 중 두셋만을 어떻게 콕 집어서 데려 오냔 말이다. 다른 애들이 "너네 어디 가냐?" 하면 뭐라고 하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껏해야 수수팥떡이나 나눠 먹을텐데, 아침부터 귓속말로 속삭여 두기도 웃기는 일이 아니냔 말이다. 게다가 여자애는 어떻게 데려간담. 이런 생각을 하다가 소년은 제 스스로 깜짝 놀랐다. 아니, 여자애를 데려 가다니. 그러고 보니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은 없는데. 어머니는 분명히 친구 셋을 데려오라고 하셨다. 여학생을 데려오라고 하신 적은 없다. 그런데 소년은 제 마음대로 남자 둘, 여자 하나를 데려오라는 것으로 들어버리고 나서, 아침부터 걱정을 하고 앉았던 것이다. 데려가고 싶은 소녀가 있어서였을까. 그랬는지도 모른다. 어떤 소녀를 데려가야 한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면, 성(姓)은 매우 특이하고 이름은 매우 평범한, 얼굴이 가무잡잡하고 목소리가 좀 굵으며, 가까이서 자세히 보면 콧수염이랄까, 코 밑에 뭐가 거뭇거뭇한 그 소녀였을 것이다. 그러나, 친구 둘도 그렇고 이 소녀도 그렇고, 어떻게 데려간단 말이냐. 안 해 본 짓을 하려니 오만 게 다 걱정이 되었다. 오전 수업 내내, 동무들 얼굴과 소녀 얼굴을 훔쳐보며 고민하던 소년은 마침내, 퍽 절묘하면서도 평범한 해답을 찾아냈다. '그렇다! 일단 집으로 간 뒤, 집에서 가까운 친구 두엇을 부르면 된다.' 이게 왜 해답인가? 콧수염 소녀는 소년의 집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이 그 점을 의식했던 것인지, 아니면 소년의 무의식이 자연스레 그런 해답을 알려주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중요한 점은, 소녀네 집은 소년의 집에서 골목을 두어 개 돌아 나가면 바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함께 부를 만한 다른 친구들 집도 5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가까운 동네 친구를 부른 셈이 되니, 설령 다른 친구들이 나중에 알게 된다고 해도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 * ---- * ---- "어, 웬일이냐?""밥 먹으러 가자." "어디? 너네 집에? 왜?" "울 엄마가, 내 생일이라고 친구들 데려와서 밥 먹으란다." 밥상에는 물론 생일 케익 같은 건 오르지 않았다. 그런 건 어디서 파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소년이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어머니가 정성껏 부친 진주햄 소세지였다. 소년중앙이나 어깨동무에 신동우 화백의 두 쪽짜리 만화로 광고하던 그 소세지였다. 이른 저녁밥을 먹고 좀 놀다보니 곧 날이 어둑해졌다. 집에 갈 때가 되어, 아이들 넷이 집을 나섰다. 남자애 둘은 시장 쪽에 살아서, 둘이 함께 재미나게 가면 되었다. 콧수염 소녀네 집은 가깝긴 하지만, 일껏 와 준 게 고마워서 바래다 주기로 했다. 사실, 저 위에서는 "밥 먹으러 가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소년의 입에서 나왔지만, 그것은 마치 수면 아래에 8할을 숨기고 볼록 한 점만 나와 있는 빙산과 같은 말이라 할 수 있다. 애 남자나 어른 남자나 할 것 없이, 남자가 여자에게 무엇을 제안할 때에는 대개 거부 당할 때의 상처를 염려한 나머지, 실패하는 훈련을 마음 속으로 기백번은 하고 딱지를 두터이 하고 나서야 입 밖에 꺼내는 것이다. 골목 하나를 지나는데, 소녀가 문득 훌쩍, 한다. 바람이 찬가 싶었는데, 다시 훌쩍! 한다. 웬일인가 싶어서 고개를 돌려 보니, 소녀가 울고 있다. 소리는 거의 내지 않았는데, 큰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너 왜 그러냐?" "아니다." "어디 아프냐?" "아니다." "왜 그러는데?" "아니다." 그러면서 소녀는 울면서 걸었다.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소년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소년이 철이 들면서 배운 것 중 하나는, 여자의 눈물이란 면도날 못지 않게 위험하다는 점이었다. 파랗게 날 선 눈물은 남자의 마음을 예리하게 할퀴고 도려낸다. 둔탁한 눈물일지라도 깊은 상처를 남긴다. 아니, 어디 그게 여자의 눈물뿐인가. 겉으론 보이지 않지만 마음 속으로 굵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남자와 마주 앉으면, 그의 보이지 않는 눈물이 내 마음에 툭툭 떨어져 상처가 된다. 눈물이란 위험하다. 초등 4년인 소년이 이런 생각을 하지는 못했겠지만, 아이라고 마음이 없을 것인가. 손발이 있다는 점에서 어른과 다르지 않듯, 마음이 있다는 점에서도 어른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손발이 좀 작은 것처럼 단지 좀 작을 뿐이다. 대신 오히려, 아이의 손발이 어른의 그것보다 덜 무딘 것처럼, 아이의 마음도 덜 무뎌져 있는 것이다. 그녀가 처음 울던 날 소녀가 우는 것은 물론 처음 보았다. 언제나 따뜻한 봄날 같은 소녀는 아니었지만, 눈이 마주치면 씩 웃는 서글서글한 인상 때문에, 우는 표정을 상상하기가 어려운 얼굴이었다. 그런 소녀가 울면서 서슴서슴 골목길을 걸었고, 그 옆에서 소년은 갑자기 뭔지 모를 싸아한 감정에 공명되며 함께 슬프게 걸었다. 이유를 알아야 울지 말라고 달랠 텐데, 그럴 수도 없었다. 그저 하릴없이 가만히 걸을 뿐이었다. 오래지 않아 소녀의 집에 왔다. 대문의 빗장이 걸려 있었다. 소녀가 얼굴을 몇 번 훔치고 나서 문을 잡고 흔들었다. 문이 덜그럭거리고, 가까운 어딘가에서 개가 짖었다. 안에서 아무개 왔나? 하는 남자 소리가 났다. 소년은 그 소리를 듣고, 나 갈께, 내일 보자 하고 돌아섰다. 돌아서서 몇 발을 떼기도 전이다. 갑자기 생각 하나가 소년의 머리에 번개 내리치듯 내리꽂혔다. 콧수염 소녀는 엄마가 없다! 아, 엄마가 없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미처 못 했을까. 소녀네는 어머니가 없었다. 소녀는 어머니 역할을 하는 언니와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평소에는 그런 줄도 잘 모르고 지나치는 일이다. 그러나, 친구의 생일에 밥을 먹으러 가서, 그 어머니가 정성껏 챙겨주는 양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말이다. 내일 아침에 소녀를 보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소년은 집으로 가는 골목길 대신, 우체국 옆으로 돌아 가는 길을 택해 천천히 걸어가며 생각해 봤지만, 좋은 생각은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는지, 소년도 약간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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