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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짤막한 영상 하나 감상하시겠습니다.
깜짝 놀라셨죠? 재미있으셨습니까? 저는 재미없었습니다. 그냥 재미만 없는 게 아니라 뭔가 불편합니다. 저도 처음 볼 때는 신기하게 생각했지만, 보면 볼수록 뭔가 불편한 겁니다. 이 불편함의 정체가 뭘까. 이 동영상은 Victor Navone라는 사람이 1999년에 만든 3D 애니메이션입니다. 자신이 만들어 낸 외계인 캐릭터를 등장시키고, 글로리아 게이너가 부른 'I Will Survive'를 사용했습니다. 3D 애니를 연습하면서 그냥 한번 만들어 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크게 인기를 끌었습니다. 어릴 때 한두 번 안 본 사람이 없고, 유튜브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올타임 인기 동영상입니다. 이 애니메이션에 쓰인 노래 'I Will Survive'는 제가 무척 좋아하는 곡입니다. 잠깐 가사를 보겠습니다. 처음에는 너무나 두려워 꼼짝할 수도 없었어요. 당신 없이 나 홀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많은 밤을 지새우는 동안, 당신이 내게 얼마나 잘못해 왔는가를 생각했어요. 그리고는 강해졌죠. 어떻게 계속 살아나가야 할지를 배운 거에요. 게이너의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계속되는 이 노래는, 마치 여성의 독립 선언 같은 느낌을 줍니다. 사랑을 빙자한 남성의 학대에 견디다 못해, 드디어 자신을 자각하고 남성의 울타리를 벗어나기로 작정한 여성의 단단한 각오가 가사에 담겨 있기 때문이겠지요. 게다가, 노래를 부른 게이너의 표정을 보면, 이러한 결단이 정말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게이너 동영상 링크는 맨 아래 붙여 두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노래는 작사/작곡자나 가수가 의도했든 아니든, 여성이 남성에 종속된 스스로를 극복하고 독립된 인격체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간주됩니다. Stephen Amico는 ‘I Want Muscles’: House Music, Homosexuality and Masculine Signification라는 글에서, 대중가요에서 여성 화자는 대개 감성적인 존재로 등장하며, 남성에 대한 깊은 사랑이나, 그게 깨졌을 경우의 고통을 노래한다. 그러나 'I Will Survive'나 'I'm Leaving' 같은 노래에서 여성 화자는 이러한 고통에 그저 항복하지 않는다. 그녀는 남성에게 대답을 요구하고, 궁극적으로 심리적 안정을 획득하게 되는데, 이는 남성으로부터 찾은 게 아니라 여성의 자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해결책은 남성의 설명에서 나오지 않고, 여성이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결단을 내림으로써 갖게 된다. 라고 분석했습니다. 더 나아가 이 노래는 성적 소수자의 권리 선언 같은 의미를 담은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이른바 '게이들의 성가(gay anthem)'로까지 불리는 것이죠. Elizabeth Kaminski와 Verta Taylor는 드랙 바에서 공연되는 노래를 모아 분석한 논문 '"We're Not Just Lip-synching Up Here": Music and Collective Identity in Drag Performances'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의 드랙 바에서, 게이 문화와 연결된 특정 노래들이 반복적으로 공연된다는 사실은 시사적이다. 공연자나 관객은 이 노래들을 '게이 성가(gay anthem)'로 간주한다. 이 노래들은 남녀 동성애자들의 연대감을 높이고 공통의 경험을 공유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드랙 쇼에서 흔히 공연되는 74곡 중에서 이렇게 게이 성가로 분류할 수 있는 노래는 23곡 정도다. 그 대표적인 노래 중 하나는 글로리아 게이너의 1970년대 히트곡인 'I Will Survive'이다. 그룹 토론에 참여한 남성은, 이 노래가 자신이 처음 동성애자로 커밍아웃 하면서 겪은 경험을 상기시켜 준다고 말했다. "'I Will Survive' 같은 디스코 성가들은 대부분 관계, 사랑, 섹스, 행복 등을 다루고 있죠. 이런 노래를 들을 때마다, 젊고 싱글이었을 때, 술집에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때가 생각납니다." 여기까지 보신 분 중에는,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인 휴고 위빙이 드랙 퀸으로 나오는 <프리실라, 사막의 여왕의 모험>이 떠오르는 분도 있을 겁니다. 이 영화 역시 제가 끔찍히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 'I Will Survive'가 쓰인 것이 우연이 아닌 셈이죠. 좌절과 외로움이 암흑처럼 드리운,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것 같은 사막 한 가운데에서, 세상에서 가장 화려할 것 같은 옷을 입은 세 드랙 퀸이 이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은 참 잊기 어렵습니다. (여담이지만, <프리실라>의 네티즌 평점은 9.21로, <매트릭스>의 9.27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I Will Survive'에는 여성이나 성적 소수자의 신산한 삶과, 그래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일어서려는 의지가 담긴 것으로 이해되고 해석됩니다. 노래가 액면 가사를 넘어 상징성을 갖게 된 것이죠.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맨 처음에 보여드린 애니메이션 동영상을 보면 좀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힘겨웠던 과거를 되새기며, 이제 스스로 독립해 나갈 것을 선언하는 바로 그 장면에서 갑자기 디스코 볼이 떨어지고, 우리의 주인공은 볼에 깔려 압사를 하게 됩니다. 노래가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면, 이 영상에도 함의가 있는 것일까요. 있다면 '닥치고 짜지셈' 말고는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위험하게까지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동영상을 만든 사람은 그런 의미를 염두에 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저 재미로 습작 삼아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등장 인물도 외눈박이 외계인 캐릭터입니다. 제작자는 이 캐릭터가 남자라고 말합니다. 이런 작품을 놓고 어떤 편견이 담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버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작자의 생각이야 어쨌든, 이 작품이 은연중에 그런 인식을 심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유튜브 동영상에 줄줄이 달린, 그저 재미있다는 댓글이라든가, 어렸을 때 아빠가 보여줬다거나 교회에서 단체로 봤다거나 하는 반응을 보니 그런 걱정이 좀 듭니다. 노래의 의미나 애니의 (의도하지 않은) 상징적 함의를 경계하는 목소리는 좀처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남성으로부터 독립해 꿋꿋하게 살기를 선언하는 바로 그 순간 하늘에서 떨어지는 디스코 볼을 보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든가, 더 나아가 사회의 기성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당차게 도전하다가는 이 꼴 난다는 암묵적 학습을 하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은, 아무래도 오지랖 넓은 '제3자 효과' 때문이겠죠? ※ 글로리아 게이너의 I Will Survive (롤러 스케이트는 걍 넘어가십...) 여성에게 바치는 성가로서나 게이 성가로서의 의미는 다이애너 로스 버전에서 더 강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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