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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애널 써킹 대회
과연 토론왕선발대회는 애널서킹대회인가? 처음 이 문제를 제기하신 windy님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내 생각은 드래곤워커님 의견에 더 가깝다. 현재진행형인 논쟁거리를 주제로 올려, 오해를 살 수 있는 진술 형태로 논쟁 주제문을 제시한 것은 분명 문제의 소지가 있다. 하지만 이를 놓고 대회 자체를 문제시하는 것은, 이러한 형태의 토론 대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미국에서 대학생 간의 공개 토론 대회는 상당한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행사다. 가장 대표적인 토론 대회인 National Debate Tournament는 1947년에 미국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이 대회 이전에도 비슷한 형태의 토론 대회가 존재했으며, 따라서 NDT의 웹사이트에 나온 토론 주제문 알카이브는 1921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또 American Debate Association를 비롯한 다양한 조직과 단체가 토론 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이들 대회는 대개 Cross Examination Debate Association(CEDA)가 제정한 규칙을 따르는데, CEDA는 해마다 토론 주제를 선정해 이들 대회에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CEDA가 관장하는 토론 대회는 미국 전역에 60개 이상이며, 그 중 전국 대회인 National Championship Tournament 는 보통 175개 팀 이상이 참가하는 가운데 열린다. 주제문 출제 방식은 문제 없다 애널 서킹과 관련한 우리의 관심사는 '4대강 GR을 시급히 해야 한다'는 주제문. 주제문을 살펴보기 앞서, 이 같은 대학생 토론 대회의 성격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토론은 독서 토론도, 법률 토론도, 학문 토론도 아닌 '정책 토론(policy debate)'이다. 책이 아니라 현실에서 이슈를 찾아내, 이 이슈와 관련한 국가의 정책을 놓고 논쟁을 벌이는 것이다. 그럼 주제문은 어떻게 제시될까. 대체로 토론 주제문은 정부의 현 정책에 대한 변화를 촉구하는 진술로 제시된다. 즉 주제문은 국가 정책과 관련하여 특정한 방향으로 개선안을 제시하는 형태를 띤다. 그리고 이 주제문을 놓고 찬성과 반대를 하는 형식으로 토론이 전개된다. 최근에 출제된 주제문 몇 개를 들어 보자. - 미국 정부는 핵무기 규모를 상당한 정도로 감축해야 하거나 핵무기의 역할과 임무를 감소시키고 제한해야 한다. - 미국 정부는 아프가니스탄, 이란, 레바논, 팔레스타인, 시리아 등의 국가에 대해, 안전 보장과 상당한 원조를 포함한 건설적 참여를 증대하여야 한다. - 미국 대법원은 Planned Parenthood v. Casey(합법적 낙태 인정), Ex parte Quirin(외국인의 미국내 공격에 대한 사법권 인정), U.S. v. Morrison(여성에 대한 폭력 처벌법의 제한), Milliken v. Bradley(흑백 학교 분리 철폐에 대한 제한) 등의 판결을 뒤집어야 한다. - 미국 정부는 교역, 인권, 무기 확산, 대만 문제 등과 관련해 중국 정부에 대한 외교적, 경제적인 압력을 강화해야 한다. - 미국 정부는 바이오 연료, 옥수수, 면화, 유제품, 수산물, 쌀, 콩, 사탕수수, 밀 등을 비롯한 농작물에 대한 농업 보조금을 거의 대부분 제거함으로써 농업에 대한 지원을 줄여야 한다 - 미국 정부는 국내 빈곤층에 대한 사회 복지 서비스를 크게 증가시켜야 한다. - 미국 정부는 불법 입국에 대처하는 정책에서 사면보다는 처벌에 집중해야 한다. 이상의 기출 주제문에서 드러나듯이, 토론 주제는 1) 현실적 이슈에 대한 2) 정책 방향을 놓고 3) 한 쪽 입장(주로 기존 정책을 수정하자는 입장)을 선택해 4) 서술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지금 문제가 되는 '토론왕선발대회' 역시 이런 토론회 형식을 빌린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번에 제시된 주제문 '4대강 정비 사업, 시급히 해야 한다'는 그 표현의 치졸함과 저급함에도 불구하고, 형식상으로만 보면 큰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주제문을 '4대강 정비 사업, 시급히 해야 할 것인가'라는 의문형, 혹은 그냥 '4대강 정비 사업' 같은 객관적 제시형으로 주지 않고, '시급히 해야 한다'라는 특정 방향을 선택한 진술형으로 준 것 자체가 문제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표현 방식에서 굳이 문제를 찾자면, 보통 현행 정부 정책과는 반대되는 형태로 주제문을 주므로 '4대강 정비 사업,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해야 좀더 원칙적인 토론 주제문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주제문을 주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부적합한 주제, 불투명한 선정 과정 그럼 아무런 문제가 없나? 아니지. 문제는 주제의 제시 형태가 아니라, 주제가 선택된 과정이다. 토론왕선발대회의 주최측 안내를 아무리 봐도, 어떠한 과정을 통해 주제가 선택되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미국의 경우는 토론회마다 다르지만, 대개 주제의 풀을 정해 공개해 놓고 그 중에서 뽑아 내는 경우도 있고, 관련자나 대중이 투표하여 결정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참여자들이 토론 대회를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폭넓게 배우고 인식을 넓힐 수 있는 주제가 선택된다. 그러나 '토론왕선발대회'는 이런 과정이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4대강 개발 사업'이라는 주제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토론 주제는 현실로부터 나와야 하지만, 현실에서 지나치게 논란이 되고 있는 주제는 토론 대회를 통해 기대하는 교육적 목적을 충족시키기 어렵다. 주제 자체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주제를 둘러싼 정치적 입장과 논란에 대한 탐구로 왜곡 변질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토론 주제문으로 '오바마가 미국의 (혹은 이명박이 한국의) 차기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라는 진술이 제시된다고 해 보자. 4대강 사업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해악과 부작용, 무익성 때문에 국민적 반대에 봉착해 있는 사업이다. 오로지 정부 여당 인사들만이 기를 쓰고 전 국가 조직을 동원해 밀어붙이는 형국이 아닌가. 이런 사안은 정책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이다. 여당과 야당, 정부와 시민사회가 칼로 나뉘듯 쪼개져 다투는 주제를 토론거리로 올린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적합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많은 분이 '토론왕선발대회'의 해당 주제로부터 삿된 의도나 저열한 잔대가리를 읽어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주제 선정 과정도 불투명하지, 정부가 온갖 홍보를 다 하며 밀어붙이는 주제이기도 하지, 욕 먹고 의심 살 모든 요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토론 대회 참여가 '애널 서킹'은 아니다 하지만 대회 참여자의 측면에서 보면, 이 토론회에 참석한다는 것만으로 '애널 서킹'을 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런 대회는 주어진 주제에 대해 열심히 조사한 뒤, 그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찬성과 반대 모두의 근거를 만들어, 어느 쪽이라도 상대방과 논쟁할 수 있는 능력을 겨루는 것이다. 참여자 개인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 개인 의견을 드러내어 치고박고 다투는 '100분 토론' 성격의 대회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망국적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사람도 찬성 근거를 준비해야 하고 준비할 수 있다.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대회를 주최하는 측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알려지지 않은 장점'을 확산할 수 있는 계기라고 계산했을 수 있지만, 그래서 욕을 먹을 사람은 주최자이지 참여자가 아니다. 대학생 토론 대회의 핵심은 research와 debate다. 정부의 정책 홍보가 아니다. 사려 깊고 신중한 대회라면, 국민이 반대하는 정부 정책을 홍보할 기회로 토론 대회를 변질시킨다고 오해할 수 있는 주제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는, 정책적이지만 정치적이지 않은 주제, 대회 참여자들이 리서치와 디베잇 과정을 통해 폭넓게 배울 수 있는 많은 주제 중에서 하나를 선택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런 성격의 대회를 국어와 관련한 기관이, 그것도 정부 산하 기관이 주최한다는 것부터 좀 이상하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학생이 팀을 만들어, 일정한 주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면서 승부를 가리는 토론 대회는 영화 <더 그레이트 디베이터스> (The Great Debaters, 2007)에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영화에 대한 한국식 패러디 <더 그레이트 그레이트 디베이터스>는 다음 포스팅으로 나올 예정.) [덧붙임] '4대강 정비 사업, 시급히 해야 한다'의 찬성 의견은 당연히 '시급히 해야 한다'지만, 반대 의견은 '천천히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해서는 안 된다'라고 본다. 시급히와 천천히 사이에는 찬반 토론을 할 만한 쟁점이 잘 만들어지지 않는다. 부분적 반대일 뿐, 전체적으로 찬성이라는 점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찬반을 명확히 나누어 지정하는 토론 대회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 게다가 어차피 현실적으로 첨예한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른 이상, 현실에서 논란이 되는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미국의 토론 주제들에도 'substantial' 'substantially' 처럼 정도를 나타내는 말이 들어가지만, 핵심은 '해야 한다'와 '하면 안 된다'의 대립이다. 혹시 주최측이 '찬성=시급히, 반대=천천히' 의 의도를 가졌다고 해도, 이런 건 쌩까면 된다. 대회 참석하실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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