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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있다. 좋아하고 존경하는 고등학교 친구들 중 하나다. 이 친구, 사회에 비교적 일찍 나왔다. 험한 일 마다않고 한 분야에서만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그런 성실과 재능 때문에 나이에 비해 일찌감치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 친구가 아파트를 사서 집들이를 하는 날이었다. 제몸처럼 친했던 고교 서클 친구들이 축하해주러 간다. 집들이하러 가면서 빈손으로 갈 수는 없다. 무엇보다, 내 일처럼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이 빈손으로 달랑달랑 찾아가는 것을 허락치 않았다. 그럼 뭘 가져가야 할까? 1) 성냥 - 요즘은 쓸모도 없고 파는 데를 찾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잔뜩 쌓인 술집 성냥을 모아갈 수는 없다. 2) 초 - 역시 쓸모가 없다. 그냥 관례적으로 생색내는 정도. 여자친구들 사이라면 예쁘고 향기로운 장식초 같은 것도 괜찮겠지만. 3) 빨래비누 - 요즘도 나오는지조차 알 수 없다. 4) 세제 - 쓸모는 많은데 좀 평범하다. 다른 사람도 많이 가져올 것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신혼 때 집들이로 받은 세제로 둘째 애 옷까지 빤다는 사람도 있다. 5) 좋은 술 한 병 가져가면 좋겠지만, 먹고 나면 끝이다. 6) 그럼 뭘... 1) 과 2) 가 전통적인 집들이 선물로 사랑받아왔던 이유는 모두 아시다시피 살림(과 재산)이 불꽃처럼 일어나라는 축복의 의미다. 활활 타오르는 불의 은유가 담긴 선물이다. 3) 이나 4) 역시 새 집에서 살림이 비누거품처럼 보글보글 풍성하게 피어오르라는 의미다. 미신이랄 수도 있겠지만, 소박하기도 하고 천진난만하기도 한 바람이 담긴 선물들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의미들을 잘 알지만, 좀 다른 걸 하고 싶었다. 이왕이면 좋은 친구의 좋은 일에 가져갈 선물로, 평범한 것 말고 특이하면서도 꼭 필요한 무언가를 생각해냈으면 했다. 그리고... 나는 무언가를 생각해 냈다. 집들이가기 며칠 전 그걸 사서 잘 포장해 두었다. 당일 저녁, 지하철을 타고 생긴지 얼마 안된 낯선 역을 향해 가면서 마음이 매우 뿌듯했다는 점을 밝혀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집들이에 가서, 나는 다른 친구들이 세제 선물 세트를 내밀 때 내가 준비해온 것도 내밀었다. 그리고 잘 놀았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내가 혹 경솔했던 것이 아닌가, 나의 좋은 의도를 친구는 오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자동차를 하나 사도 네 바퀴에 막걸리를 부어가며 고사(?)를 지내야 편한 마음이 드는 게 우리네다. 사물 (차나 집 처럼 개인의 애정과 노력이 많이 투자된 것일수록) 과 그 사물의 소유주 사이에 많은 상징 고리를 부여하고 사는 게 또 우리네다. 그 상징 고리란 물론 행운이나 재수, 발복(發福) 같은 추상적 개념이 상징화된 것들이다. 그건 오래된 관습 같은 것이고, 그것을 그저 나의 선의나 실용적 용도로 넘어서기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문제는 저 행운이나 발복의 관습적 상징으로 볼 때 나의 선물은 좀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가져간 것은 소화기였다. 나는 내가 준비한 이 소화기가 새 집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남의 집이 아니라 자기 소유의 집이니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면서도 집주인이 쉽사리 사게 되지는 않는 것이다. 친구의 새 집 집들이 선물로 이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는가. 또 나는 이 놈이 일상 생활에 필요한 장비일 뿐 아니라 (필요할 때가 없어야 하겠지만), 새 집의 안전을 지키는 지킴이로서도 훌륭한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거품은 하이타이에서만 나오냐. 소화기에서도 거품이든 가루든 뭐가 무지하게 나온다. 무엇보다, 친구의 일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내 마음을 듬뿍 담은 것이다. 그러나 주인이 그렇게 생각해 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내가 가져간 것의 포장을 풀면서 친구는 고마워했고, 나도 기뻤다. 그리고 잘 놀았다. 그 뒤로 우리는 소화기에 대해서 한 번도 말을 나눈 적이 없다. 물론 그 친구는 그 때 잔뜩 들어온 세제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 뒤로, 지금까지도, 내가 잘 선택한 일인지 확신이 없다. 앞으로 같은 기회가 생기면 자신있게 또 그런 종류의 선물을 준비하리라고 말할 수 없다. 내 마음과 관습 사이의 거리 때문이다. 그리고 그 관습이란 너무나 견고하다. 그런 견고함 때문에, 나는 내 마음 속으로 꽤 후회했다, 저 소화기. 그냥 남들 하는 대로 할껄. 관습에서 자유롭고 싶은데 안되는 경우, 많다. 암묵적인, 그러나 거대한 사회적 압력이 그 한 이유다. 그래서 나는 잘 못한다. 하고도 후회한다. 그러나 이 잡글을 들여다보고 있는 당신은 나보다 훨씬 잘 하리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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