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더기가 된 <모내기> by deulpul

한 부모가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뚜렷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 존재 자체를 불편하게 여긴 국가가 아이를 데려가 가두어버렸다. 애타는 부모가 사방팔방으로 읍소한 결과, 국제기관에서 애를 데려다 가둔 것은 개인의 기본적 인권을 침해한 것이므로 부모에게 되돌려주고 보상하라고 결정했다. 그러나 국가는 여전히 아이의 석방은커녕 부모의 접견조차 거부하고 있으며, 그 동안 아이는 빛이 들지 않는 습기찬 감방에서 썩고 병들어 가고 있다.

예술가가 작품을 생산하는 과정을 산고(産苦)에 비유한다. 창작의 고통이 어린애를 만들어낼 때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 낸 작품이 권력의 칼날에 의해 찢기고 난도질당할 때 느끼는 고통도 역시 애지중지하는 자식의 살이 찢겨나가고 피흘리는 것을 바라보는 고통과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화가 신학철의 1987년 작품 <모내기> 를 이적표현물이라는 이유로 압수해 보관하고 있는 한국 정부. 최근 유엔 인권이사회로부터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것으로 결정되어, 또다시 OECD 회원국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인권 후진국임을 세계 만방에 고하며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유엔 인권이사회는 한국 정부가 <모내기> 를 압수하고 화가를 처벌한 것에 대해, 이는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제19조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것으로, 한국 정부는 작품을 원상 복구하여 화가에게 돌려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유죄 판결을 무효화하고 그 결과에 대해 보상해야 한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러한 결정이 나고 이와 관련한 보도가 나가고 난 뒤에도 변화를 보이고 있지 않다. 보도 직후 법무부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으며, 반환도 어렵고 배상이나 보상은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발 더 나아가, 서울지검 공안2부는 5월4일, 화가가 자기 그림이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기 위해 신청한 열람등사 신청을 허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 이유가 뭔지 궁금하신가? 검찰이 내세운 이유는 "그림이 대법원의 확정 판결에 의해 이적표현물로 규정돼 타인에게 보여주는 행위 자체가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 반포죄에 해당하며, 그림이 대법원 확정 판결에 의해 몰수돼 국고 귀속된 만큼 작가에게는 처분권이 없어 신씨는 열람등사 신청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는 것이다.

점잖은 입에서 욕 나오려고 한다. 예술가의 창작물에 이적표현물이라는 딱지를 붙인 사법부도 기가 차지만, 2000년에 사면 복권된 이 화가의 그림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행위가 여전히 이적표현물 반포죄란다. 허허... 검찰, 처벌할 사람 많겠소.

우선, 유엔 인권이사회의 결정 사실을 보도한 신문방송들이 대부분 이 작품을 함께 게재했으니 기자 수십 명과 언론사 수십 개를 이적표현물 반포죄로 잡아넣어야 하겠으며, 그동안 여러 매체에서 각종 특집에 이 작품이 실렸으니 그것도 뒤져서 색출해야 할 것이고, 작년 말 신학철 특별전을 열면서 전시실 하나를 통째로 <모내기> 사건에 할애한 동숭동 마로니에미술관 책임자, 큐레이터, 관련자들도 모조리 잡아들이고, 불온 작품에 동조하는 작품을 낸 동료 화가들도 빼놓으면 안되겠지.

뿐만이랴. 2000년 광주비엔날레 때 예술과 인권이라는 특별 전시에서 문제의 작품을 소개했으며 아직 그 공소 시효는 끝나지 않았으니, 당시 비엔날레 예술총감독과 예술감독, 전시 기획자, 행사를 주최한 재단법인 광주비엔날레 이사장과 광주시장, 행사를 후원한 문화관광부장관, 국정홍보처장관, 외교통상부장관, 국방부장관, 행정자치부장관, 산업자원부장관, 건설교통부장관, 관세청장, 국회사무처장 들도 모두 잡아넣어야 마땅하렷다.

게다가 온갖 정보가 바닷가 모래알처럼 널려 있는 게 인터넷이고, 그 가운데에 저 작품 한두 개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시간이 남는 검찰 직원들을 동원해 바닷가 모래알 줍기도 해야 할 것이겠지.

나? 저 위에 올려놓은 그림은 신학철의 그림이 아니라 그의 그림에 당신들이 전가의 보도로 즐겨 쓰는 족쇄를 조합한 "내 작품" 이니 나는 빼주시구려. 물론 한국 사법부가 아직도 전근대적 파시스트 근성을 버리고 있지 못하다는 국가 기밀을 누설한 데 대한 처벌은 얼마든지 환영이오. (온전한 <모내기> 는 아래에 큼지막하게 붙여놨다오.)

더 기가 막힌 이야기가 있다. 서울중앙지검 증거물과의 한 구석에 처박혀 있는 문제의 작품이 심하게 훼손되어 복구가 불가능한 걸레쪽 상태라는 것이다. 우선 아래 글을 보시라.

1980년대 민중미술과 통일운동을 상징하는 신학철 화백의 유화작품 '모내기'가 심하게 훼손돼 원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된 것으로 뒤늦게 드러났다.

이 작품은 지난 99년 법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인정돼 몰수된 상태로 그동안 서울중앙지검 증거물과에서 보관해 왔다. 가로 130cm, 세로 163cm 크기의 유화인 이 작품은 현재 여러번 접혀서 작은 서류봉투에 넣어져 방치되고 있다. 접힌 부분의 물감이 떨어져 나가는 등 예술품으로서 사실상 폐기상태나 마찬가지여서 충격을 주고 있다.

신학철씨는 이같은 사실을 지난 2000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없는 다른 압수품을 되찾으려고 검찰을 방문했다가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고 증언했다. 사실상 복구가 불가능한 상태로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는 셈이다.

...

재판과정에 간여했던 미술비평가 유홍준 교수는 "PVC 관에라도 넣어서 보관해줄 것을 재판부에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고 말했다. 따라서 '모내기'는 재판이 마무리된 다음 어느 시점엔가 네모 반듯하게 접힌 채 서류봉투 속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신학철 화백은 지난 주 서울중앙지검 증거물과를 찾아 '모내기'에 대한 증거물 열람신청을 했다. 지난 2000년 이후 지금까지 그림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서울중앙지검 공안과는 벌써 일주일이나 된 신 화백의 열람 요구를 받아들일지 여부에 대해 결정을 미루고 있다. 증거물과 담당 직원은 "검사님이 결정을 안했다"며 "종합적으로 검토하실 것이고,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일각에서는 검찰이 몰수조치된 예술품을 멋대로 방치했다가 국내외적인 반발에 부닥치자 곤혹스러워 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특히 화가 본인이 '보존상태를 확인하겠다'고 열람신청을 해오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 CBS 노컷뉴스 기사]


아아... 이게 그들이 하는 일이다.

<모내기> 에 대한 얼토당토않은 사법적 단죄가 과거 군사정부 시절의 소행이라면 과거를 반성하는 의미에서라도 빨리 회복시켜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표현의 자유가 과거에 비해 좀더 자유스럽게 논의되는 시대라고 낙관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다. 하기야 정권은 바뀌어도 그 밑의 사람이 변한 것이 없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도대체 인간의 머리속을 헤짚어 족쇄를 채우려고 하는 저 1984년 식의 파시스트적 발상은 언제나 가야 끝날 것인가.

하긴 놀랄 일도, 새로운 일도 아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잣대로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패러디 작품에 대해 사법적 단죄를 가하고 있는 것도 지금 벌어지는 일이고, 그렇게 해야 사회가 안녕하다고 여기는 전근대적 가부장형 파시스트식 사고방식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인간들이 권력 구석구석에서 기생충처럼 우글거리고 있는 게 우리 상황이니 말이다.

한 그림에 대한 평가는 경찰관이나 검사나 법관이 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좀더 안녕한 사회를 위해 다른 일이나 분주히 신경써주면 된다. 창작물에 대한 평가, 그 창작물의 작품성이나 예술적 성취에 대한 판단은 그 일을 본연으로 하는 비평이라는 장치가 있다.

세상을 보는 눈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또 달라야 한다고 믿는다. 내가 설령 신학철의 <모내기> 가 묘사하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고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 가 묘사하는 세계에 동의하지 않으며 이현세의 만화 <천국의 신화> 에 나온 표현 방식에 공감하지 않더라도, 사법이라는 이름으로 이같은 창작물에 녹슨 칼날을 들이대는 권력의 만행에 기막혀하는 이유다.

아래 그림은 문제의 작품 <모내기> 이다. 그림의 공간적 구도를 남북한 지도로 단순 무식하고 과감하게 생각한 당시 사법 당국의 유치한 시각은 빼놓자. 당신은, 검찰과 법원이 걱정하는 대로, 이 그림을 보고 나니 정말 북한이 살기 좋은 나라라는 생각이 드는가? 막 북한에 가서 살고 싶어지는가? 허허헛... 남 걱정 하지 말고 당신들이나 잘해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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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비안졸다크 2004/05/06 22:01 # 답글

    거참, 원래 정치하는 사람들 머리속에 든게 없다지만, 그림을 접는 다니. 아무리 유화라도 쇼크군요.
  • deulpul 2004/05/07 13:18 # 답글

    네... 멍- 입니다. 그나저나 비안졸다크님 블로그는 알 수 없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군요. (먼눈) 그래도 무지하게 재미있습니다, 크하하핫~ (닮아간다)
  • 미친과학자 2004/05/11 12:11 # 답글

    놀러왔습니다~~

    저기 그림 밑에 익숙한 샘아저씨가 물에 빠지는게

    미국 공화당 한국지부회원님들의 심기를 거슬렸나 보죠.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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