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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과 비슷한 여름날이거나 혹은 좀더 여름이 농익은 계절이었을 것이다. 참깨가 어른의 가슴패기까지 자랐을 때니까 초가을 쯤인지도 모른다. 국민학교(나는 초등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다) 5학년 정도 때 일이라고 기억된다.
국민학교 때... 나를 학교에 보낸 건 팔할이 축구다. 집에서 십분만 걸어가면 나오는 학교 뒷문, 물론 방과후에는 좀더 편하게 공을 찰 수 있었는데, 아마 그 때였을 것이다. 집을 가려면 먼지 풀풀 날리는 신작로를 십리 가까이 걸어가야 하는 친구도, 한시간에 한 번씩 지나가는 경원선 열차를 피하며 기찻길을 걸어 4, 50분을 가는 친구도, 문둥이가 나온다는 새터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 친구도 모두 가방을 팽개치고, 펠레와 차범근과 허정무와 기타 내로라하는 스타들이 총출동하는 A 매치급 경기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뒷문 쪽의 골대는 스탠드가 둘러싸고 있었지만, 정문 쪽의 골대는 학교의 조립식 시멘트 담장과 가까이 붙어 있었다. 그 너머로는 등하교 시간에 왁자지껄한 오솔길이 있고, 그 바로 다음에 문제의 깨밭이 있었다. 발힘이 너무 세서 우리가 "똥뽈" 이라고 별명지어준 - 꼭 그런 애가 하나씩 있다 - 친구가 찬 공이 골대는 물론 담장을 훌쩍 넘어가 버렸다. 축구공은 곧 생명이다. 아마 그 때 그 축구공은 전교에서 몇 안되는 가죽공이었던 것 같으니, 생명도 그냥 생명이 아니라 VIP 급 생명이었다. 비록 여기저기 튿어지고 헤어지기는 했지만. 공 주인이 누구인지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대여섯 꼬맹이가 정문을 나와 오솔길 주변을 뒤지다 밭으로 들어섰다. 평상시에는 전혀 몰랐는데, 그러고 보니 그 밭은 깨밭이었다. 깨는 우리 머리를 충분히 감출 만큼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그 무성한 깨밭을 여기저기 헤치며, 우리는 VIP 를 찾기 시작했다. 그 때, 멀지 않은 곳에서 단말마의 비명을 연상시키는 전율스러운 고성이 울려퍼졌다. " 어떤 놈들이냐!! 남의 깨밭 다 망치는 놈들이!!!!" 아뿔사, 하필 재수없이 밭 주인이 나타난 것이었다. 흔히 짐작할 수 있듯이, 우리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총알처럼 학교 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는 "이놈들, 거기 안서?" 하는 소리가 연신 계속됐다. 뛰다가 생각해보니, 우리가 학교 안으로 들어간대도 그 스크루지 같은 밭 주인은 우리를 따라올 테고, 숙직 선생님한테 이르기라도 하면 문제가 더 커질 것 같았다. 무엇보다 해는 길고 우리는 아직 축구공을 못찾았단 말이다! 차라리, 솔직히 사과하고 용서를 빌고 공을 찾아오는 것이 빠른 해결책 같았다. 그 때만 해도 나 머리 꽤 잘 돌아갔다. 하긴 솔직히 말하면, 도망치던 내 발길을 멈추게 한 것은 당시 한창 유행이던 자유교양책 - 녹색 표지로 된, 정부에서 보급한 어린이용 권장 도서들 - 에 등장하던 정직한 어린이, 체리 나무를 베고도 정직하게 말해서 혼나지 않았던 워싱턴, 책을 빌려가 적셔 먹고도 정직하게 말해 오히려 칭찬을 받은 링컨 따위였다고 고백한다... 그래, 난 그 때 순진하기도 했던 것이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을 뿐만 아니라, 거꾸로 몸을 돌려, 씩씩대고 쫓아오는 밭 주인에게로 다가갔다. 밭 주인의 "야, 임마!!" 와 나의 "저, 있잖아요..." 가 동시에 나왔다. 나는 우리가 밭을 망치러 들어간 것이 아니라 공을 찾으러 간 것이며, 깨를 크게 망치지 않도록 조심했으며, 그래도 밟힌 깨들이 있을 테니 용서해 달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자유교양책식 고백을 하기도 전에 갑자기 머리 위로 돌덩이같은 꿀밤 세례가 쏟아져나왔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깨밭 아저씨는 워싱턴의 아버지, 링컨의 이웃집 아저씨와는 너무도 다른 반응을 보여주었고, 나는 책과는 너무나 다른 예상치 못한 반응에 허를 찔려, 악다구니를 들으며 하릴없이 머리통만 대주고 있어야 했다. 눈물이 핑 돈 눈으로 학교 쪽을 힐끔 보니 친구들이 교문에 숨어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나만 왜 여기 서서 꿀밤을 얻어먹고 있나, 그냥 함께 "발를"걸! 하는 후회가 마구 밀려왔다. 내 생애에, 정직하면 손해본다는 것을 체험한 첫 사례다. 당시의 장면 하나하나가 너무도 인상적이어서, 지금도 마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다. 어른 손바닥보다 컸던 깻잎들이며, 그것을 헤칠 때 나던 냄새, 머리통에 쏟아지던 아픔까지. 후기: 우리는 그 다음날쯤 해서 깨밭을 다시 한번 뒤졌다. 어쨌든 공은 찾아야 했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공을 찾았고, 전날과는 달리 별로 조심하지 않은 악동들 덕분에, 깨밭은 상당히 망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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