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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선생이 남민전 사건에 연루된 대공용의자가 아니라 양심적 지식인으로서 한국 사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 무렵, 저는 그가 쓴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를 읽으며, 저자가 틀림없는 여성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저의 오해는 그의 여성스러운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지만, 서문에 그가 쓴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세요" 형의 문체는 이러한 착각을 확신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책을 다 덮고 나서야, 그 나긋나긋한 문체 속에 얼마나 큰 고통과 그 고통에서 벼려진 강한 힘이 담겨 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가 이 책을 통해 1990년대 중반의 한국 사회에 벼락처럼 던져 놓은 것은 "똘레랑스" (tolérance) 였습니다. 이제는 흔히 알려진 보통명사가 되었지만, <나는 빠리의...> 가 처음 나올 때만 해도 이 단어와 그것이 상징하는 사상적 경향은 차별과 억압이 일상이던 한국 사회에 매우 낯선 것이었습니다. 그가 프랑스 사회에서 추출하여 제시한 똘레랑스가 단순히 그의 머리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국에서의 고통스런 체험 속에서 싹터 나온 것이어서 그 울림이 더욱 컸습니다. 요즘 몇 가지 일을 계기로 이 매력적이면서도 흔히 오해하기 쉬운 개념을 다시 곰곰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하나하나 정리해가야 할 제 문제의식들입니다. 1. 무엇을, 혹은 어디까지 똘레랑스할 수 있을 것인가 많이 알려진대로, 똘레랑스는 서로 다른 사상과 생각이 서로 존중되고 이해되며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는 것을 말합니다. 적당한 우리 말을 찾는 시도가 많이 있었는데, 그 결과가 아량 (雅量, 너그럽고 깊은 도량) 이나 관용 (寬容, 너그럽게 용서하거나 받아들임), 용인 (容認, 용납하여 인정함)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말 단어들이 의미하는 너그러움이나 용서와 같은 정서적 뉘앙스와 똘레랑스는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보편적입니다. 한 지적대로,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ㆍ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을 뜻하는 똘레랑스는 감정이 아니라 이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 입니다. 최근에 여기저기 많이 회자되어 지식인연하는 사람들의 필수 단어처럼 되어버린 똘레랑스, 혹은 구체적으로 이 말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 말이 상징하는 바의 경향을 배경으로 하여 나오는 다양한 주장들을 보면서, 도대체 무엇을, 혹은 어디까지 똘레랑스할 수 있고 해야 할 것인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똘레랑스의 정의(定義)에 근거하면, 다른 사람의 생각, 행동 방식, 신념,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의견 등등에 대한 용인(그나마 가장 가까운 우리말이라고 생각합니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견 명쾌하고 명백한 것 같지만, 현실에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서로 다른 생각과 행동과 가치관을 무조건적으로 용인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똘레랑스인가요? 분명히 아닌 것 같습니다. 첫번째 예로, 똘레랑스를 인정하지 않는 신념과 가치관을 들 수 있겠습니다. 똘레랑스를 똘레랑스하지 않는 신념을 똘레랑스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홍세화 선생이 이미 못을 박아 놓았더군요. 그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똘레랑스는 역사적으로 앵똘레랑스에 단호히 반대하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마치 똘레랑스를 나와 다른 남을 용인하는, 그래서 무엇이든지 모두 다 용납하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똘레랑스는 '칼'이에요. 단호함입니다. 즉 앵똘레랑스에 대해서 단호하게 반대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차이는 차이일 뿐이지, 그 차이를 핑계로 차별이나 억압, 배제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똘레랑스는 앵똘레랑스를 똘레랑스하지 않고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예컨대, 똘레랑스의 태도는 다양한 사상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레드컴플렉스나 국보법적 사고, 전체주의적이거나 획일화를 지향하는 경향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비타협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혹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식의 상대적 가치만 포함하고 있으면 모두 용인의 대상이 될까요. 그것도 분명히 아닌 것 같습니다. 이것은 똘레랑스가 분명한 이성적 성찰 위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컨대, 홍세화 선생이 똘레랑스의 국가적 구현으로 본 프랑스에서 똘레랑스는 정치적 망명객에게는 적용되지만 피신한 독재자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또 극좌에서 극우를 아우르는 다양한 사상적 스펙트럼에는 적용되지만, 나라를 팔고 독일 나치에 협력한 매국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종교나 신앙, 혹은 종교를 가지고 있는가의 여부 자체에 대한 존중은 똘레랑스의 내용을 이루는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종교를 빙자하면서 성속 모두에서 엄청난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사이비 종교들은 어떻습니까. 사악한 그 교주들과 그에 세뇌된 수많은 교도들의 난행을 똘레랑스의 이름 아래 용인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또 조세형이나 신창원이나 유영철이 한국 사회의 어떠한 부조리한 모습에 대해 나름의 일정한 문제의식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문제의식이나 그 문제의식을 표출하는 방식까지 똘레랑스의 이름으로 용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똘레랑스란 상대적인 가치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용인하는 무원칙적인 태도가 아님은 명백합니다. 잘못된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지요. 저 개인적으로는 잘못된 것까지 용인하는 것은 똘레랑스가 아니라 악의나 이기의 합리화(남들도 다 하는데, 뭐... 나혼자 잘먹고 잘살자는 게 아냐...), 혹은 배경을 거론하는 상황론 (그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잖아?... 우리 사회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혹은 편의주의 (누이좋고 매부좋고... 다 좋은 게 좋은 거야...) 혹은 결과주의 (무슨 짓을 하든 결과만 좋으면 땡이야...) 에 다름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똘레랑스로서도 배척해야 할 대표적인 것들이라는 생각입니다. 어쩌면 똘레랑스란 누구나 다 옳다는 "절대적 상대주의" 가 아니라,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명징한 이성적 판단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결국 프랑스식 똘레랑스란 잘못된 것에 대한 용인이 아니라 낯선 것, 새로운 것, 나와는 다른 것에 대한 용인이라고 파악해야 될 것 같습니다. 낯선 것이나 나와는 다른 것들이란 예컨대 인종이라든가 (흑인, 히스패닉, 동남아출신 노동자 등), 성정체성이라든가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등), 사상적 경향이라든가 (자본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잘못된 것" 을 결정하는 것도 수많은 가치관이 얽힌 복잡한 일이지만, 적어도 위의 괄호 안에 열거한 예를 놓고 단호하게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는 어려운 일일테니 말입니다. (무엇이 잘못된 태도나 행동인가를 규정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우선 간편하게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가의 여부로 판단해 볼 수 있겠습니다.) 홍세화 선생은 "(똘레랑스는) 신앙과 출생지의 차이, 이런 모든 것에 대해 차별하고 억압하는 것에 대해서 맞서 싸우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런 측면에서 보면 똘레랑스는 사회 성숙과 사회 변화 진보의 무기죠." 라고 말합니다. 뒤집어 말하면, 사회를 미성숙하고 부패하고 이기주의적인 전근대로 퇴보시키는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 가치에 대한 용인은 똘레랑스가 아니라는 말이라고 봅니다. 궁극적으로 똘레랑스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 필요한 필요조건으로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흐르는 물이 썩지 않듯, 다양한 의견이 여기저기서 샘솟고 이들이 잘 어우러져서 건강하고 생명력 넘치는 담수를 만드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따라서, 건강한 사회를 형성하는 데 부정적인 행위와 사고까지 무조건적으로 용인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홍세화 선생의 말을 재인용하자면, "마치 똘레랑스를 나와 다른 남을 용인하는, 그래서 무엇이든지 모두 다 용납하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똘레랑스는 '칼'이에요. 단호함입니다." 2. 개인의 똘레랑스, 국가의 똘레랑스 똘레랑스를 개인과 국가 사회의 차원으로 나누어 보는 것도 흥미있습니다. 본질적으로 다양한 사람과 의견이 모자이크처럼 모여 형성되는 국가 사회에 비해, 주관적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마련인 한 개인이 일관되게 똘레랑스의 태도를 유지하기란 훨씬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개개인이 완벽한 똘레랑스의 태도를 유지하고 있지 못하더라도 국가 사회가 건강성을 유지하면서 이러한 개인들을 묶어 전체로서의 똘레랑스를 견지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장 손쉬운 똘레랑스의 구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개인적으로는 동성애자이거나 이들을 이해하거나 이들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이들 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국가 사회 전체 차원에서 동성애자들에 대해 차별하는 정책은 채택하지 않는 식으로 말입니다. 프랑스의 극우주의자 르펭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프랑스의 일반인 중 하나인 x 는 르펭의 극우주의와 국수주의를 혐오할 수 있습니다. 그가 아무리 프랑스식 사회화를 통해 똘레랑스를 체득하고 있다고 해도, 그의 시각에서는 분명히 잘못된 르펭식 극우주의를 용납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극단적으로 르펭에게 "닥쳐!"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또다른 프랑스인 y는 르펭을 지지합니다. 만일 x와 y가 얼굴을 맞대고 만난다면, 그들은 치열한 논쟁을 벌일지도 모르고, 프랑스의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서 가끔 벌어지듯이, 멱살잡이를 하거나 서로 뺨을 때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르펭의 극우주의가 프랑스의 사상의 자유시장 (market of ideas) 에서 자유럽게 거래되도록 하는 한, 개개인이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프랑스 사회 전체로서는 똘레랑스를 견결히 유지하고 있는 것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히려, x와 y 같은 주관들이 서로 어울려 큰 그림으로서의 객관을 만들고 똘레랑스가 성립할 배경을 만드는 셈이 되는 것이지요. 3. 우리 사회의 똘레랑스 똘레랑스에 관한 한 한국 사회는 점점 더 기형적인 모양을 띠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똘레랑스라는 말은 차고 넘치는데 정작 실질적 똘레랑스는 점점 사라져가는 판입니다. 흔히 그저 왜 내 생각은 인정해주지 않느냐, 혹은 네 생각을 내게 강요하지 말라는 논쟁술의 차원에서만 운위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주장이란 대부분 똘레랑스에 대한 피상적 이해나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은 위에서 본 것과 같습니다. 물론 최근 십여년 동안 한국 사회의 똘레랑스는 (이러한 표현이 가능하다면) 그 총량이 매우 늘어난 것이 사실입니다. 레드컴플렉스가 서서히 지워지고 있으며, 대통령에 대고 육두문자로 욕하는 사람들도 남산에 끌려가 고문받다 쥐도새도 모르게 죽을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불과 십여 년 전이라면 펄쩍 뛸만한 "노동당" 이름의 정당도 국민의 지지를 받아 원내에 진출했습니다. 조갑제 같은 사람도 남이야 듣든말든 저 혼자 주물럭대며 뭔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포용할 수 있는 대역이 넓어졌다는 점에서 분명 바람직한 변화임에는 틀림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렇게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변화도 함께 따라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회 사상의 조류는 흔히 시계추의 운동과 비슷한 형태로 움직인다고 합니다. 한 가지 풍조가 나타났다가(+) 그 흐름이 스러지고 가라앉으면 중립의 상황(0)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반동의 결과로 전혀 반대되는 풍조(-)가 등장하는 식이지요. 우리 사회와 국가가 오랫동안 개인의 자유로운 사상과 이념을 부정하고 용인하지 않는 것을 국가 이념으로 삼아왔다면, 이제 그 반동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으로도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다양하면서도 복잡한 생각과 이념이 모조리 용인되는 듯한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 많은 것들이, 복잡하지만 진지하지 않은 사회에서 흔히 발견되는 이기주의나 편의주의, 소아병적 흥미에 근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도대체 아무런 진지한 토론도 벌어지지 않는 유영철 팬카페나 얼짱 강도 팬카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습니까. 겉으로는 이렇게 다양한 가치가 등장하고 인정되고 주장되는 것처럼 보이는 와중에도 깜둥이는 여전히 깜둥이이고 짱깨는 여전히 짱깨입니다. 오히려, 얼치기 똘레랑스가 확산되면서, 짱깨라고 부를 수 있는 "자유"가 더 확산되는 느낌입니다. 저는 이러한 풍조의 뒷면에는 이성에 대한 (근거 없는) 불신, 객관주의적 가치에 대한 무지나 무관심, 공동체적 삶에 대한 몰이해, 개인 중심의 세계관 ("사람 중심의 세계관" 이 아닙니다) 같은 것들이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똘레랑스가 허용되지 않았던 폭압적 사회가 변하면서, 그 반동으로 어쩔 수 없이 왜곡된 똘레랑스의 만발을 맛보아야 한다면, 궁극적으로 양자가 지양되어 건강하고 이성적인 사회로 성숙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나혼자만의 정리] 1. 똘레랑스는 서로 다른 생각을 무조건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2. 똘레랑스는 잘못된 것을 단죄하는 데 단호하다. 3. 똘레랑스는 분명한 이성적 인식과 판단 위에서 존재한다. 4. 똘레랑스는 사회를 성숙시키는 필요조건이다. 5. 똘레랑스는 개인에서보다 사회 전체에서 더욱 중요하다. P.S. (1) 제 개인의 생각입니다. (2)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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