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평화상 후보, 죽음의 커플 by deulpul


한 달쯤 뒤면 다른 부문의 상들과 함께 2004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발표됩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올해 수상자 후보에는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와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가 쌍으로 끼어 있습니다.

이들을 추천한 사람은 노벨상 평의회가 있는 노르웨이의 국회의원(무소속) 잔 시몬센입니다. 시몬센은 추천사에서 "두 사람은 이라크전쟁을 수행하여, 비록 대중 살상 무기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독재자를 제거했으며 세상을 더욱 안전한 곳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미친놈(madman)을 제거했다." 라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고 합니다.

무리한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있고, "전쟁이 곧 평화" (The war is the peace) 라고 믿는 정치 지도자들이 "평화" 상 후보로 추천되는 것은 매우 희극적입니다. 일부에서는 두 사람에 이스라엘 총리 아리엘 샤론을 함께 묶어 넣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비꼼도 나오고, 두 사람이 하고 있는 일과 비슷한 일을 수행한 2001년 9-11 테러범 페베즈 무사라프와 마울라나 모하마드 아자르도 후보자로 추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런 인식 때문에 두 사람의 평화상 후보 선정을 취소하라는 움직임도 활발합니다. 한 서명운동 사이트에는 지금까지 세계 도처에서 12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서명했습니다. (저도 잠시 뒤에 서명하러 갑니다.)

노벨상을 제정한 알프레드 노벨의 규정에 따르면, 평화상 수상자는 "국가 간의 우애를 증진하고 군사력을 폐지하거나 감축하고 평화 추구 노력을 촉진하는 데 최대의, 혹은 최선의 성과를 보인 사람이어야 한다" (shall have done the most or the best work for fraternity between nations, for the abolition or reduction of standing armies and for the holding and promotion of peace congresses) 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부시는 집권 이래 미국의 군사비를 크게 늘였으며 이라크를 무력 침공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어디든 자기들이 선제 공격하겠다고 공공연히 일갈하고 있는 판입니다. 블레어 역시 이차대전 이래 군사력을 가장 많이 동원한 영국 수상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수상자를 뽑는 5명의 노벨위원회가 두 사람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관측됩니다.

부시와 블레어가 쌍으로 노벨 평화상 후보자로 추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2002년에도 이들은 노르웨이의 우익 국회의원 하랄드 네스비크에 의해 후보자로 추천됐습니다. 추천 이유는 "장래에 평화에 대한 최대의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 테러리즘에 대한 단호한 행동" 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두 지도자가 이라크에 대한 군사 공격 위협을 가하는 상황" 이어서 당선자 리스트에서 일찌감치 탈락했습니다.

당시 노벨위원회는 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를 2002년 수상자를 발표하면서, 지구촌의 분쟁을 대화로 해결한 공로로 카터를 수상자로 결정한 것은 곧 부시나 블레어의 정책을 비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도 많은 사회운동 단체들은 두 사람의 후보 지명에 반대하여 시위를 벌이고 노벨상위원회에 항의 이메일, 편지 보내기 운동을 전개했었습니다.

관측통들은 그럴 리는 없지만 만일 두 사람이 올해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다면, 1973년 당시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가 캄보디아에 폭격을 퍼붓고 칠레의 민선 정부를 뒤엎은 독재자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를 지원한 바로 그 해에 노벨상을 수상한 것과 유사한 최악의 수상 사례가 될 것이라 내다보고 있습니다.

194개 개인과 단체(50)로 사상 최다를 기록한 2004년 평화상 후보자들 중에는 요한 바오로 2세, 유럽 연합, 구세군, 프랑스 대통령 자끄 시락, 전 체코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 쿠바 재야 인사인 오스왈도 파야, 특정되지 않은 중국의 반정부인사들 등 뿐만 아니라, 나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나 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으로 인종 청소로 악명높았던 슬로보단 밀로세비치 따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시/블레어뿐만이 아니군요.

평화상 후보자의 공개 선정은 2월1일에 일찌감치 마감됩니다. 노벨위원회는 후보자로 뽑힌 사람들을 공개하지 않지만, 추천자들에 의해 후보자 명단이 알려지게 됩니다. 노르웨이의 국회의원 아무나 평화상 후보를 추천할 수 있고 그밖에도 대학교수나 정부 인사 등 무려 수천 명이 후보 추천권을 행사할 수 있으므로, 평화상 후보로 뽑힌 것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 노벨위원회의 시각입니다.

165명의 후보가 올라온 2003년에는 이란의 인권변호사 쉬린 에바디가 수상자였습니다. 평화상은 다른 상들과 함께 10월에 발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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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힘의 논리에서 자유로운 공간은 없는가? 2004/09/09 21:23 #

    노벨 평화상 후보, 죽음의 커플 각기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기에 모두가 서로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 볼 수 있다고 생각해야만 하는 걸까? 독재자를 뒤에서 호위해주고 묵인해주다가 어느날 그들의 이권에 의해 그 독재자를 없애려고 했었던 이들이다. 그리고 그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야만 했다. 그런데 그들을 그저 '독재자를 없애준' 이들로써만 부각시키다니... 슬프다. 세상 그 어느 곳도 힘의 논리에서 자유로운 곳이 없는 듯 하다. 비록 작은 정의 나마 여전히 남아있다는 사실이 증명 되기를 바라지만...... more

덧글

  • 비안졸다크 2004/09/09 07:24 # 답글

    뭐 전에도 있던일이니까 '어떤 전쟁광이 추천했나 보군' 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노벨상중 어쩌면 가장 의미가 없는 것이 평화상이 아닐까요. 아 그리고 투표 사이트 링크가 설정이 잘못되었네요.
  • 지아쿨 2004/09/09 15:19 # 답글

    위의 두 전쟁광이 평화상을 수상하는 희대의 웃지 못할 코미디는 결코 없으리라 믿고 있어요. 노벨위원회가 무뇌아들이 아닌 이상...;; 그나저나 올려놓으신 사진이 섬뜩하네요. 마치 두 사람이 거울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선 듯한 것이, 도플갱어를 연상시키는군요
  • nicole 2004/09/09 21:32 # 답글

    잠시 둘러보고 님의 블로그를 링크시켰습니다.(알려드리는게 예의인가 싶어서.ㅎㅎ;;) 좋은 글들이 많이 있네요. 기쁜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 Hikaru 2004/09/10 00:48 # 답글

    두고두고 읽고 싶은 님의 글이 많아서 링크하고자 합니다.
    배울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 Hikaru 2004/09/10 00:54 # 답글

    그나저나 정말, 아첨쟁이나, 전쟁광이 추천했나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 힘이라는게 정의마저 묵살시키는 일이 행여나 생길까 걱정이 됩니다. 전쟁은 정의가 될 수 없습니다.
  • deulpul 2004/09/10 13:38 # 답글

    제 블로그의 관례에 따라 사진에 대한 출처를 밝히지 않았는데, 저 사진은 2004 세계보도사진전 (http://www.donga.com/wpp/) 에 나온된 영국 사진기자 닉 댄지거의 작품입니다.

    글에서 밝혀놓은 서명 사이트에 가봤더니 한국 쪽에서 몇 분이 다녀 가신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일부러 찾아가셔서 자잘한 수고를 겪어가면서 서명해 주신 여러분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혹시 이 글을 보고 가신 게 아니더라도 고마움은 여전합니다. 촘스키는 항상 말합니다 - 작은 참여가 세상을 바꾼다. 그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비안졸다크: 평화상에 대한 비안졸다크님 생각에 공감합니다. 링크는 곧 고쳤습니다. 감사드려요~

    지아쿨: 네...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코메디지만 정말 비극적인 코메디가 되겠네요...

    nicole: 먼 데까지 찾아와 주셨네요. 안 알려주셔도 괜찮지만, 알려주시니 더욱 고맙습니다~ 하하..

    Hikaru: 아흑- 어깨에 짐을 쾅! 지워주시는군요~ 네... 힘은 주로 정의와 대척점에 서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인간 세상의 불행이라고 할까요...
  • kris 2004/09/10 16:16 # 답글

    랜덤으로 들어왔다가 저도 가서 서명하고 왔어요.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질수 있다는 것에 분개하지만 막을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막고 싶네요! 글고 이글루 링크하렵니다!^^
  • deulpul 2004/09/15 11:58 # 답글

    아, 랜덤으로 이 두메산골이 걸리기도 하는군요~ 하하... 반갑습니다. 또 서명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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