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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의도와 동기와, 그 의도와 동기가 낳은 수많은 결과와, 그 의도와 동기가 의도하지 않은 수많은 망외(望外)의 결과와, 또 수많은 개인과 집단의 가치와 태도와 이해관계가 얽히고섥혀 만들어지는 것이 세상사다. 복잡한 세상사를 한 단어, 한 구절, 혹은 한 문장으로 들여다보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유혹이지만,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가능하더라도 복잡한 척추동물들을 단세포 동물에게나 어울릴법한 현미경으로만 분석해 보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경우가 많다.
학창시절, 존경하던 한 선생님이 개인적인 방학 과제로 "사람은 도대체 왜 사는가" 에 대한 에세이를 써 오라는 터무니없는 숙제를 내주셨다. 적을 모르면 달려들기가 쉽지 않다. 나는 방학 동안 짬짬이 그 숙제에 대해 생각하고, 크리슈나무르티나 임어당, 리처드 바크 따위, 그 시대에 그 나이의 깜냥으로 떠올릴 수 있는 책들도 뒤적여보며 답을 만들어보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개학을 며칠 앞두고 나는 볼펜을 굴리다가, 문득 "희망" 이라는 글자를 떠올렸다. 가만히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이 흔해빠진 단어가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어떤 구체적인 경우를 가정하더라도 이 단어를 들이밀면 만능열쇠처럼 다 들어맞는 것처럼 보였다. 숙제를 제출한 며칠 뒤 선생님이 부르셨다. 그는 그의 특성인, 인자한 듯 하면서도 쑥스러워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나의 숙제에 대해 아주 간단히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답이 너무 쉽게 나온다. 너 생각 많이 하지 않았지?" ---------- * ---------- * ---------- * ---------- 한자어 증오는 미워함의 강한 형태다. 정도의 깊음을 탈거하면 그 간명한 뜻은 미워한다는 것이다. 미워하는 것은 그 자체로 죄악인가. 논어 전편에 흐르는 공자의 생각 중 중요한 한 가닥은 어짊(仁)을 향한 치밀하고 맹렬한 지향이다. 어질다는 것은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긍정하고 낙관하는 무골호인의 성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짊은 세상 모든 것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이 아니라, 선행을 사랑하고 악행을 증오하는 실천적 덕목이다. 어진 사람이란 잘못을 보고 화내고 미워하며, 스스로를 그 잘못의 나락에 집어넣지 않도록 끊임없이 경계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증오는 사악함을 제압하고 지양할 필요조건이자 살아 숨쉬는 지침으로 승화한다. 맹자에서 보이는 사단(四端) 중 하나인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스스로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이다. 이는 바로 의로움과 연결된다. 여기에서도 증오의 긍정적 면모를 읽을 수 있다. 미움이나 증오 자체가 문제가 될 리 없다. 칼이 그 존재만으로 스스로 문제가 될 리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칼이 도적의 손에 들렸을 때 그 칼은 흉기가 되지만, 의사의 손에 들렸을 때는 인명을 구하는 도구가 된다. 앙시앙 레짐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바스티유 감옥의 문을 깨뜨렸을 때 유럽의 근대가 비로소 시작되었듯이, 어떤 경우 증오는 그 자체로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에너지가 된다. 맑스주의는 증오의 과학이라는 (좀 이데올로기적인) 표현이 있다. 맑스주의뿐이랴. 세상에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해 놓은 모든 도덕 교과서들이 좀 과장되게 말한다면 "제대로 미워하는 법"을 적시한 증오의 지침서가 아니던가. 증오로 벌어지는 죄 (hate crime) 가 있다. 아무런 실질적인 동기나 이유 없이 그저 상대방이 미워서 저지르는 범죄다. 미국에서 유색 인종에 대한 증오를 실천하는 KKK 같은 자들이 저지르는 범죄이기도 하고, 한국에서라면 그저 사상적 경향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죽일 놈으로 치부하는 저열한 사회 구조도 증오의 범죄 범주에 들어갈 법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증오 범죄에 대한 증오가 그 종류의 범죄를 꾸준히 줄여왔다는 점이다. 또한 증오는 그 너머에 항상 애정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사랑이 그 너머에 증오를 대립쌍으로 전제하고 있는 점과 마찬가지다. 죄에 대한 증오는 비죄(非罪)에 대한 희구를 전제하고 있으며, 전쟁이나 전쟁광에 대한 증오는 그 배경에 모호하나마 평화에 대한 애정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증오 범죄에 대한 증오는 보편적 인간의 존엄과 기본권에 대한 뜨거운 애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증오를 무조건 긍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증오를 무조건 부정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미워함이나 증오란 매우 입체적인 말로서, 똑같이 미움이라고 표현되더라도 그 뒤에는 수많은, 간혹 정반대의 동기가 자리할 수 있다. 이 복잡한 다면체 같은 심리적 경향을 오로지 나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너무나 표피적인 "쉬운 대답" 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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