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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ABC 차트" 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높은 사람이 관청이나 군부대를 방문했을 때, 해당 기관의 현황을 일목요연하게 도표로 만들어서 지휘봉으로 한 장씩 넘기며 보고할 때 쓰이던 차트입니다. 군대에서 많이 쓰여서 ABC (Army Briefing Chart) 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한때는 모나미 매직으로 이 차트 글씨를 깨끗하게 잘 쓰는 소위 "차트병" 이 행정 주특기로 각광받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수해 같은 대형 재해가 났을 때 재해대책본부 같은 곳에서 이 ABC 차트를 가끔 볼 수 있습니다. 영어로는 flip chart 라고 합니다.
군부대에 워드 프로세서가 도입되면서 차트병이 사라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프레젠테이션용 어플리케이션인 MS 파워포인트 프로그램이 널리 보급되면서 이 ABC 차트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파워포인트는 발표자와 청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일반 기업체, 연구 기관, 학교, 행정부서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사회 곳곳에서 폭넓게 쓰이고 있습니다. 물론 발표 성격에 따라 아직도 일반 차트나 슬라이드, OHP 따위가 쓰이기도 하지만, MS 오피스에 기본으로 들어 있는 파워포인트의 영역은 점점 더 넓어져가고 있습니다. 프로젝터 같은 적당한 시설만 뒷받침된다면 다른 매체의 장점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을 뿐아니라 음성, 동영상까지 탑재할 수 있는 이 프로그램은 글자 그대로 파워풀한 발표 수단이라 하겠습니다. 수많은 기획자, 연구자, 개발자들의 애환을 담고 있는 이 프로그램이 급기야 한 개인의 자살을 프리젠테이션하는 데도 쓰였다고 합니다. 물론 사실은 아니고, 파워포인트가 차고 넘치는 작금의 사무 환경을 비꼬는 픽션 기사로, 풍자 신문 <더 어니언> (The Onion) 에 실린 소식입니다. 미국 오레곤주 포틀랜트의 한 기업 연구개발 책임자인 론 버틀러는 최근 자신의 자살 결심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48쪽짜리 파워포인트 발표 자료를 남기고 숨졌습니다. 버틀러의 친구이자 회사 동료인 헥터 베니테즈에 따르면, 버틀러는 이같은 발표 자료를 남기고 한 병 분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고 합니다. "처음에 그의 자살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너무나 놀라고 충격을 받아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회사 사람들과 함께 론의 파워포인트 발표 자료를 보고난 뒤, 우리는 그가 그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워 했는지, 또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면서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에 대해 매우 "생산적이고 효과적이며 실용적인" 지식을 갖게 됐습니다." 버틀러의 파워포인트 프리젠테이션 파일인 finalgoodbye.ppt 는 다음과 같은 네 섹션으로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1) 현재 상황의 분석, 2) 사과와 작별 인사, 3) 유언과 장례에 관한 조언, 4) 최후의 단상들 (맨 아래 그림 참조). 버틀러의 상사이자 회사 사장인 브랫포드 윌리엄스는 버틀러의 자살 발표 자료를 보고 나서 "매우 명쾌하고 간명하며 설득적인 훌륭한 발표였다" 라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직원들이 모두 발표장을 나간 뒤, 나는 뒤에 혼자 남아서 론의 파워포인트 자료를 "슬라이드로 보기" 로 다시 들여다 봤지요. 야, 진짜 죽이는 발표 자료였다구요. 그의 자료는 MS의 파워포인트가 제공하는 다양한 멀티미디어를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한 기막힌 것이었지요." 버틀러의 파워포인트 발표 제1 섹션에서 그는 삼차원 입체로 구성된 막대그래프를 사용하여, 2년 전 부인과 아들이 교통사고로 숨진 뒤 점점 커져 왔던 슬픔을 효과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또 자기 부인의 생전 모습을 담은 JPEG 사진이 좍 갈라지며 그녀의 묘지 사진으로 바뀌는 장면에서, 동료들은 모두 그가 제시하는 메세지를 명확하고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제1 섹션의 마지막은 핵심 목표의 요약과 그 성공을 위한 요인 정리로 끝맺었습니다. 이 페이지의 두 단짜리 텍스트는 다채로운 색깔의 배경 그림을 바탕화면으로 깔고 있었으며, 큼직한 클립아트 물음표를 집어 넣어서, 그가 처한 선택의 갈등을 생생하게 전달했습니다. 프리젠테이션의 제2 섹션은 동료와 친구들에게 보내는 작별 인사가 불릿을 이용한 리스트로 차근차근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회사의 정보기술 책임자인 빌 샤프에 따르면, 이 "사과와 작별 인사" 섹션에 쓰인 색깔은 디지털 프로젝터의 특성을 고려하여 매우 치밀하게 선택된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보기에 론은 우리 회사에서 Gretag-Macbeth Eye-One Beamer 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제3 섹션인 "유언과 장례에 대한 조언" 파트에는 버틀러의 친구와 가족, 친척 명단이 전화번호가 링크된 형태로 들어 있었으며, 마지막 유언과 유해의 처리에 대한 언급은 한 줄씩 화면 밖에서 안으로 날아들어 오는 효과를 이용한 텍스트로 제시되어 있었습니다. 인사부장 게일 에버츠는 "이건 정말 기막힌 프레젠테이션 방법이군요. 론은 이걸 만드는 데 틀림없이 꽤 많은 시간을 투자했을 거에요. 이거, 주제가 무거운 것만 아니었다면 우린 이 프리젠테이션을 신입사원 교육용으로 썼을텐데 말이죠"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비판적인 평가도 나왔다고 합니다. 회사 홍보담당자 지타 프루리얀은 이 프리젠테이션에 좀 미흡한 점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뒷부분의 화면흘리기가 좀 약한 것 같아요. 화면과 텍스트를 흘리는 이유는 청중의 관심을 잡아두고 분위기를 밝게 유지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거든요. 또 "유언과 장례" 부분을 끝맺으면서 연속으로 쓴 문닫는 소리 효과는 너무 남용되었고 좀 서툴게 보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햄릿의 말을 인용하면서 화면이 점점 어두워지도록 설정한 것은 정말 놀라운 선택이었습니다. 발표장 안에서 눈시울이 붉어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거든요." 버틀러의 파워포인트 파일을 들여다보던 동료들은 그 파일의 최초 작성일이 2004년 8월8일로 되어 있는 데 놀랐습니다. 베니테즈는 "그가 이런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진작에 알아챘어야 했어요. 제가 무심했습니다. 그가 지난 주에 컴퓨터에서 파일들을 하나하나 삭제할 때도 저는 또 하드가 날아갈까봐 백업 작업을 하나보다 하고 넘겼거든요." 아들을 잃고 상심에 찬 버틀러의 부모는 자신들과 아들이 그동안 그리 가까운 관계가 아니었다고 말했습니다. 71세인 아버지 제랄드 버틀러는 "아들은 수시로 사진과 집에서 찍은 동영상들을 이메일로 우리에게 보내 주었습니다. 그런데 우린 컴퓨터를 쓸 줄 모르거든요. 론이 보낸 것들을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우리에겐 무용지물이었지요. 마침내 론이 자살을 알리는 "쪽지" 를 보냈지만 역시 우린 그걸 열어볼 수 없었지요." 회사 부사장 비비엔 에스터하우스에 따르면 회사는 버틀러의 마지막 프리젠테이션 파일을 영구 보존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회사 담당자들은 그의 finalgoodbye.ppt 파일을 안전한 문서 저장소에 보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곳은 바이러스나 컴퓨터 오작동으로부터 보호되는 곳이므로 언제나 그의 파일을 열어볼 수 있습니다. 론도 그런 존재였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래는 론 버틀러의 프레젠테이션 슬라이드 일부. ![]() ![]() ![]() ![]() ![]() Image copyright: The O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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