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최대의 비디오/DVD/게임 타이틀 대여 체인 업체인 블록버스터는 작년 12월 말부터 새로운 광고를 대대적으로 선보였습니다. 텔레비전 광고 내용은 블록버스터 체인점 앞에 남녀노소 수십 명이 모여 미친듯이 환호하며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래 그림). 신문과 인터넷 광고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소요를 방불케 하는 분위기를 만들며 기뻐 날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들이 축하하는 것은 바로 'The End of Late Fees.' 블록버스터가 올해 1월1일부터 비디오나 DVD, 게임 타이틀의 대여 날짜를 넘겼을 때 물리게 되는 연체료를 폐지한다는, 이른바 ‘No Late Fee’ 라는 새로운 정책입니다. 비디오를 빌려다 놓고 날짜를 어겨 연체료를 물거나, 적어도 반환일에 늦지 않도록 날짜를 따지느라 신경깨나 써야 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저렇게 미친듯이 기뻐할 만도 하겠습니다. 아는 분 중에 몇 년 전에 비디오 대여점을 운영하시던 분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 분의 골칫거리 중 하나는 상습적으로 반환 날짜를 지키지 않는 수많은 단골 고객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택가에서 단골 손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장사이니만치 정해둔 연체료를 야박하게 꼬박꼬박 다 받기는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비디오 대여점은 무엇을 생산하거나 판매함으로써 수익이 생기는 업종이 아니라, 순수하게 대여물(비디오)의 회전을 통해 수익이 발생합니다. 인기 비디오들이 고객의 방구석에 쌓여 썩고, 그 때문에 비디오를 빌리러 온 손님들을 빈손으로 되돌려보내야 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면, 그 비디오 대여점의 수익은 아무리 잘해도 ‘똔똔’ 을 맞추기가 어렵다 하겠습니다. 상습 연체는 대여점들의 가장 큰 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연체를 막기 위해 물리던 연체료를 폐지한다는 것은 놀라운 결정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저는 블록버스터의 광고를 보면서, 이 대형 대여 체인이 매우 위험한 승부수를 던졌거나, 아니면 또다른 매우 획기적인 경영 전략을 세운 모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쨌거나 손님쪽에서 보면, 날짜 어길까봐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마음에 드는 영화는 기간에 관계없이 계속 보관하며 거듭해 볼 수 있으니, 광고에서처럼 미친듯이 기뻐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기분좋은 일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네, 광고를 보면서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광고만 믿고 비디오를 늘어지게 보던 사람들이 막상 이를 반환하러 블록버스터를 찾아갔을 때, 점원이 이들에게 들려주는 말은 광고와는 좀 다른 것이었습니다. 빌려간 지 일주일이 넘은 비디오에 대해 1.25달러를 내라고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고객이 “연체로 없앴다며?” 하고 항의하면 점원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연체료는 없어졌소.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방침을 만들었소. 즉 고객이 빌려간 비디오나 DVD가 반납일로부터 일주일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을 경우, 우리는 고객이 이 영화를 너무나 좋아해서 사려고 마음먹은 것으로 간주하오. 해당 비디오는 중고로 고객에게 판매된 셈이 되는 것이오. 판매 대금은 고객이 가게에 등록해 둔 신용카드에서 자동으로 빠져나가게 된다오. 만일 일주일이 넘은 뒤에 고객이 비디오를 가져오면, 우리는 고객이 이 비디오를 사지 않기로 마음을 바꾼 것으로 간주하고, ‘재비치 비용’으로 1.25달러를 물리는 것이오.”
이게 뭡니까. 연체료가 없어지는 대신 재고 비용으로 돈을 물린다니. 결국 늦게 반환하면 덧돈을 내야 하는 건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문제는 광고 어디에도 그런 방침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연체료 폐지에 기뻐 날뛰는 사람들만 있었지 연체료 대신 새로 부담해야 하는 재고 비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걸 가만두고 볼 미국인들이 아닙니다. 곧 미국 47개 주 검찰이 소비자 기만 혐의로 블록버스터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그리고 3월29일, 블록버스터는 잘못을 인정하고 모두 63만달러 (약 6억3천만원) 을 벌금으로 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블록버스터는 ‘No Late Fee’ 정책을 계속하겠다고 했지만, 대신 그에 따르는 단서 조항을 소비자에게 좀더 명확히 알리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합니다. 대여 영수증에도 좀더 자세한 정보, 말하자면 대여한 비디오를 구매한 것으로 간주될 경우 얼마가 청구되는지 따위를 명시하기로 했습니다.
블록버스터는 1월부터 ‘No Late Fee’ 정책을 시작한 이래 매상이 상당히 올랐으며, 그 중 많은 부분이 이 새로운 정책 덕분이라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현재 블록버스터는 미국 전역에 5,600개 체인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광고나 계약서 따위에서 소비자에게 유리한 내용은 대문짝만하게 올려놓고 정작 주의해야 하는 단서 조항들은 깨알보다도 작은 글씨로 촘촘히 써 두는 것은 소비자를 골탕먹이는 고전적인 수법입니다. 이젠 간 크게도, 그런 조항은 아예 완전히 빼버린 광고를 내놓고 있습니다. 광고가 아무리 ‘피할 건 피하고 알릴 건 알린다’ 는 것이라 해도, 이처럼 사기성까지 담고 있어서야 안되겠죠. 소수의 사람을 오래 속이거나 많은 사람을 잠깐 속일 수는 있지만, 많은 사람을 오래 속일 수는 없다는 말은 광고에서도 역시 유효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림들: 블록버스터 홈페이지에서.




덧글
카스미 2005/04/06 18:47 # 답글
종종 이런 광고를 접하곤 합니다. (예를 들어 최저가 보장제도) 역시 소비자들이 비판하며 들어야겠죠. 그리고 정책차원에서도 적절한 규제가 필요할 것입니다.imanwon 2005/04/06 20:45 # 삭제 답글
정말 정나미 떨어지는 기업이네요. 미국에 살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미국에는 비디오 대여 체인점이 블록버스터 외에는 거의 없다시피 하지 않나요?기불이 2005/04/06 22:12 # 답글
언제나 fine print 를 주의깊게 봐야하죠...Hikaru 2005/04/07 00:44 # 삭제 답글
그래도 일주일이면 충분히 보고 돌려줄 수 있을 것 같은데.우리나라는 최신작이 보통 1박2일, 때 지난 영화도 길어야 2박3일인 것 같던데. 미국이 본디 일주일을 잡는다면 사기성이 짙겠지만, 미국도 길어야 2박3일이던 것을 일주일로 연장 해 준 것이라면 이정도의 논리는 이해도 되네요.
happyalo 2005/04/07 07:28 # 답글
이야~ 처음엔 무슨 전략이지 했는데 상술이라는 것에는 정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군요.그러니 정신 바짝 차리는 수밖에... 절대로 장사꾼이 날 위해 뭔가를 해줄리는 없으니 말이예요.
A-Typical 2005/04/07 11:40 # 답글
제가 알기로 빌려간지 일주일이 넘은 것이 아니고 반납일에서 일주일이 넘으면 구매로 전환됩니다. 그리고, 구매 전환 후 30일 내에 어필하지 않으면 구매로 굳습니다. ^^예전과 다른 점은, 연체료는 연체일에 따라 엄청나게 올라가지만, restocking fee는 정액이라는 점이죠. 연체료에 비하면 엄청 저렴한거에요. -,.-a 블럭버스터쪽에서는 한해 2천억원이 넘는 연체료를 포기한 결단이라는 것 같던데요.
전에 제가 썼던 글 트랙백 날립니다.
아참, 요즘 Netflix같은 월정액제도 도입한 것 같더군요.
불감자교수 2005/04/09 10:24 # 답글
비디오 대여점도 이젠 바끼어야 할때죠전 인터넷에서 영화 다운로드해서 보는데 별로 비싸다는 느낌이 없던데요 항상 좋은글 잘봅니다.
와니 2005/04/12 05:26 # 삭제 답글
아 블락버스터 추억의 이름이군요..예전에 미국 살땐 게임 빌려하고 그랬었는데 흐으..
알다리 2005/04/12 07:15 # 삭제 답글
아주 예전에 아는 형이 비디오가게를 했었는데..거기서 알바를 해준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저도 비디오 대여해가서 연체를 안한건 아니지만 고질적으로 하는 분들이 있더군요...사실 업주 입장에서는 대박들은 한번 이라도 더 대여를 해야 남는거거든요 그런대 대여해가는 사람입장에선 보다가 못보면 다 보고 반납하는..
그 대박을 돌리지 못하는 만큼 연체료에서 충당을 하게되는거죠
제가 알바를 할때만 해도 대형비디오대여 업체들이 들어설때인데
작은대여점들은 연체료마저 없다면 문닫게 되는거죠...
나중에야 알게 된거지만..큰 대여업체들이 주변 작은샵을 죽이려고 담합한적도 있더군요..
어쨋거나 저런식의 광고는 좀 그렇죠...핫..
겉만보고 믿지 말고 안의내용을 눈여겨 보는 센쓰!!!도 있어야할듯하네요..^ ^)/
deulpul 2005/04/14 10:23 # 답글
카스미: 네, 밝은 눈이 언제나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기치는 눔한테는 당할 수가 없다는 말도 있고, 열 포졸이 한 도둑 못 잡는다는 말도 있고... 끙imanwon: 가장 대형 업체이긴 한데, 그 말고도 많이 있습니다. 최근에 찾아보니 블록버스터는 영국, 호주 같은 데도 있네요...
기불이: 네, 작은 글씨라고 무시하다간... 아, 그런데 그런 건 정말 읽기 싫어요...
Hikaru: 이 가게도 하루이틀의 단기로 빌려줍니다 (예외도 많음). 아래 A-Typical님 말대로, 대여기간 이후 일주일이면 오히려 숨이 덜 차는 셈이 되고, Hikaru님 의견처럼, 오히려 소비자 입장에서 좀 나아진 결과이기도 하겠네요. 문제는 그런 내용을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는 점.
happyalo: 단기적으로 보면 장사꾼이 날 위해 뭔가를 해주는 때도 있긴 있나봐요. 장기적으로 보면... 역시 내 돈을 빼내가기 위해서지만요.. 하하.
deulpul 2005/04/14 10:29 # 답글
A-Typical: 그렇군요~ 좀더 정확하도록 고쳤습니다. 감사드려요. 이전에 관련 내용을 글로 쓰신 줄 알았더라면 내용을 좀더 압축할 수 있었을텐데, 조금 더 자세히 찾아보고 쓸 걸 그랬네요. 뭔가를 쓰기 전에 항상 구글과 이글루스 검색을 거치며, 특히 이글루스 안에서 이미 나온 내용은 중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이 경우 제가 집어넣은 '블록버스터' 검색이 A-Typical님의 '블럭버스터' 를 잡아내지 못했군요, 하하-. 늦었지만 UNC 챔피언 등극도 축하드려요.불감자교수: 네... 제가 직접 간접으로 아는 비디오방 하시던 분들은 모두 망하거나 전업했으니, 분명 바뀌어야 할 때이긴 한 모양입니다. 블럭버스터의 몸부림도 그같은 변화의 한 표현 같기도 하구요.
와니: 한국에서 블럭버스터를 보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하하.
알다리: 네... 이른바 '규모의 경제' 를 내세우며 큰 덩치로 밀고 들어오면 대부분 속수무책인 경우가 많은가봐요. 연체료 꼬박꼬박 물려도 또 안오고... 난감하죠?